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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은 흔히 접하는 '토마토(tomato)'를 어르신들께서는 도마도라고 부르는 경향이 짙다.
오늘은 왜 어르신들이 도마도라고 부르는지 알아 보려고 한다.
토마토는 1866년 병인박해를 이유로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에 의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1866년에 고종은 유교사상을 거부하는 프랑스 선교인들을 유교사상을 뒤집어 없으려한다는 이유로
프랑스선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조선은 이미 유교사상이 정치-문화-일반 백성에게 뿌리깊은 상태였고
천주교는 이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하여 프랑스 선교인들을 대놓고 박해했다.
고종은 이미 자신이 왕으로서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느꼈으며, 내부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자 병인박해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는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에겐 좋은 이유가 되었고
곧바로 병인양요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프랑스의 군인들은 대부분 전투병사 보다는 오랜 항해를 버티기 위해
배안에서 작물을 키울수 있는 농민들과 요리사, 항해중 물고기를 포획할 수 있는 어부, 그리고 의료인들이 80%이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프랑스선교인들에게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정보를 알고있었으므로
군함에 비치된 함포만으로도 조선에 위협을 가할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병력보다는 오랜 항해를 버티기 위한 병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병인양요의 주축을 이룬 함장 '마릉 드 마테러' 장군은 해군 출신이었지만, 그 휘하의 부하들은 대부분 농부와 어부출신 장교들 이었다는 부분이 이를 뒷바침 해준다.
농부출신의 장교는 함선내에서 안전하고 빠르게 수확할 수 있는 토마토를 재배하자고 건의했고, 대다수의 장교들도 이에 동의해 토마토를 재배하는 곳을 함선의 어미부분에서 재배하면서 조선으로 항해했다.
병인양요의 여파로 인해 조선은 프랑스군에 지금의 김포지역을 내어주게 된다.
조선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던 프랑스군대는 김포지역에 가져온 토마토를 재배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양이 프랑스와 달랐던 탓에 토마토는 제대로 재배되지 않았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후 조선의 식물학자였던 '우구라(조선인 아버지,프랑스인 선교인이었던 어머니의 혼혈)'선생님께서 조선의 땅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방법을 연구한 뒤 조선땅에 맞는 토마토를 재배하기에 이렀다.
이렇게 점차 조선 땅에서도 토마토를 재배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토마토라는 식물이 낮설었고 입맞에도 맞지않았다.
일부 농민들은 토마토를 '사이비 사과'라고 비난하며 토마토를 배척했다.
그렇게되자 토마토는 일부 가난한 백성들에게 거의 무상급식에 가까운 정도로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토마토 라는 단어는 백성들에게는 낮설었고, 일부 부유한 농민들은 '토마토'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토마토는 토마토라고 불리우지 않게 되었고, 일부 백성들에게는 도마도라는 은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후 왜놈들의 침략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매국노 외에는 일반백성들과 지주들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왜놈&매국노 휘하에서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왜놈들의 수탈과 매국노들의 억압에 의해 일반 백성들은 토마토가 거의 주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토마토를 도마도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모두들 도마도 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후 19세기말까지도 토마토라기보다는 도마도 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터넷의 보금과 한-불 간의 문화교류 그리고 우구라 선생님의 후손인 우기리 선생님의 '방울토마토' 품종개량으로 인해 인해 이제는 젊은층의 사람들은 대부분 토마토 라고 불르게 되었으나 아직도 어르신들은 토마토를 도마도 라고 부르고 계신다.
출처 : htpps://neamury.sangsanggura.co.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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