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 중 독립운동가가 많았다는 문명의충돌님의 댓글을 보고
그 뻔뻔함에 충격을 받아 글을 하나 새로 올립니다.
독립운동하던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내쫓은 게 한국의 기독교 교단입니다.
주기철 같은 사람이 신사참배 안하겠다고 버티니 교회에서 그를 내쫓고 교단은 목사 자격을 박탈했죠.
해방되고 나니 기독교인들이 주기철을 영웅시하는데,
자기들이 죽인 거나 다름없는 사람을 자기들 죄는 쏙 빼놓고 선전용으로 고인을 써먹고 있는 거지요.
님같은 기독교인과 주기철 같은 사람들은 같은 편이 아닙니다.
님을 포함한 한국 기독교는 그런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내쫓고 남은 99% 순도의 가라지 집단이예요.
뻔뻔해도 너무 뻔뻔합니다.
기독교도 일제 초기엔 사회 문제엔 좀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3.1 운동 때 한 번 데이고는 일제가 뭘 어떻게 하든 우린 천국에만 관심 있다는 분위기로 바뀌었죠.
그러고선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일제에 미군에 독재세력에 기득권에 빌붙고 협조하며
국민의 고혈을 뽑아먹는데 일조하면서 살아남아온 거구요.
로마 시절부터 기독교는 권력의 부역자이거나 권력 자체를 탐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역사적인 경험으로 볼 때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내부의 적은 아마 이들일 거예요.
북한이 쳐들어오면 교회에 김부자 사진을 걸어놓고 주체사상은 성경적이라고 설교를 할 거고
일본이 쳐들어오면 예배시간에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일제시대 때 그들의 신앙의 선배들이 했듯이 다시 완장을 차고 다른 사람들을 들들 볶겠죠.
천황을 위해서 전쟁터로 나가라느니 성노예로 봉사하라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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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 목사들이 당당한 이유 "교회 지키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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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교단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므로 무수한 역사가 분분하게 된다. 일례로 1959년 합동과 통합 교단의 분열을 기술할 때 통합 측은 학장의 횡령 사실을 거론하고, 합동 측은 WCC 찬반 문제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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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미국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일본의 조선 점령을 상호 묵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입지는 제한됐다.
조선 백성의 편을 들어 일본에 맞서려 했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됐고 조선 땅에 머물렀던 선교사들은 일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거나 일본에 우호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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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3.1운동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선언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앞세워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그것은 완전한 오해였다.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를 겨냥한 구호였을 뿐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애초에 해당사항에 없었다.
미국이 도와줄 것을 믿고 전 기독교가 투신했던 3.1운동의 실패는 커다란 상처와 실망을 남겼다. 이후 기독교는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세 지향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손을 내밀었고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대거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 한국 초기 사회주의자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로 구현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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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매주 예배를 드린 교회는 다 신사참배를 한 교회예요. 목사들은 일본식 군복을 입고, 교인들 모두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고, 천황을 향해 동방요배를 드렸고요, 출애굽기와 같은 일제가 보기에 선동적인 본문은 모두 빼고 복음서만 설교했어요. 예배 후에는 모든 교인들이 신사로 가서 참배하는 것이 주일 예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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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출옥 성도들은 일제에 굴복한 목사들을 향해 백번 양보하여 2개월만이라도 자숙하라고 요청했으나 그들은 끝내 거부하며 이렇게 변명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신사참배 반대해서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는 일본 등쌀 견디면서 교회 지키느라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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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1997년 평양노회에서, 2007년 통합총회에서 복권되었다. 복권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면직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주기철 목사는 1940년 장로교 총회에서 지시 불이행 즉,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는데,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그토록 존경했던 주기철 목사가 면직된 상태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양 목사는 해방 후에도 50년이 넘도록 복권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계의 요직을 꿰차고 있던 인물들이 모두 부끄러운 역사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역사 청산 문제는 기독교도 피해갈 수 없다. 친일인명사전 등 역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부각될 때마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이들 상당수가 기독교 인사들이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권력과의 밀월을 즐기며 낯 뜨거운 역사를 이어갔다. 미군정 시기 교회는 일본이 남긴 적산을 불하받아 몸집을 키웠고, 1951년 아시아 국가 최초로 군목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군대의 비호 아래 특혜를 누렸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국가조찬기도회, 3선 개헌지지, 유신지지 등으로 권력에 힘을 실어 준 대신 건물 및 토지 불하, 불법 건축 승인, 그린벨트 해제 등 유무형의 혜택을 받으며 군사정권의 보호 아래 크게 성장했다. 군사정권이 지켜주는 준성역. 양 목사는 당시 교회를 그렇게 묘사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면서 비빌 언덕이 사라지자 교회의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근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간 덕지덕지 붙은 고질적인 문제가 표면으로 올라왔을 뿐이다.
양 목사는 전 세계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기독교의 스펙트럼은 지나치게 근본주의로 쏠려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