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 cavaliers polonais, sabre au clair, qui chargent à toute allure les chars allemands au début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cette image de Polonais, désespérés et idéalistes, s'attaquant aux envahisseurs nazis super puissants est un mythe, disent les experts.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칼을 든 폴란드 기병들이 독일전차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했다는 것 : 절망에 빠지고, 현실과 유리된 폴란드인들이 매우 강력한 나치 침략자들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신화라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Pire encore: le perpétuer, c'est prolonger la propagande nazie
가장 최악의 것은, 이 신화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것은 나치의 선전에 투항하는 것이다.
Comme nombre de légendes, celle-ci a été bâtie sur une histoire réelle, explique à l'AFP l'historien Christoph Mick de l'université britannique de Warwick.
많은 신화들이 그런 것처럼, 이 신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라고, 영국 워릭 대학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믹 이 AFP통신에 설명했다.
Le 1er septembre 1939, le premier jour de l'offensive nazie contre la Pologne, environ 250 cavaliers polonais ont attaqué l'infanterie allemande à Krojanty. Mais après avoir réussi à disperser l'ennemi, ils ont été surpris par des blindés allemands émergeant d'un bois. Plusieurs dizaines de soldats et de chevaux ont péri.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대한 나치의 침공이 시작된 날, 크로얀티에서, 약 250의 폴란드 기병들이 독일 “보병”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적을 패주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이 기병들은 숲쪽에서 나타난 독일군 전차의 기습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 십 명의 기병과 말이 죽었다.
«Arrivés peu après sur le champ de bataille, des journalistes allemands et italiens ont saisi l'image de corps de cavaliers et de chevaux abattus en face de deux chars allemands», raconte M. Mick.
«잠시 후 전장에 독일,이탈리아 기자들이 도착해서, 2대의 독일 탱크 앞에 쓰러져 있는 폴란드 기병 과 말의 시체를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라고 믹 교수가 말했다.
«Cet épisode a été utilisé par la propagande allemande pour preuve de la faiblesse de l'armée polonaise et de l'incapacité des Polonais à mesurer la force de la Wehrmacht. La cavalerie polonaise n'a jamais attaqué les chars allemands», affirme-t-il, tenant ainsi des propos similaires à ceux de nombreux experts contactés par l'AFP.
«이 이야기는 독일군의 힘과 대비되는, 폴란드군의 취약함과 폴란드의 무능을 보여주는 증거로, 독일 선전당국에 의해 이용된 것이다. 실제로, 폴란드 기병이 독일 전차를 공격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그가 확인해 주었고, AFP 통신이 접촉했던 많은 전문가들 같은 지적을 해주었다.
Le mythe a servi aussi d'autres objectifs de la propagande allemande. La doctrine du «Blitzkrieg» -- guerre éclair -- était basée sur des avancées rapides des forces motorisées appuyées par les avions de la Luftwaffe.
또한 이 신화는 독일 선전당국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그것은 «전격전»을 홍보하기 위한 것으로, 전격전이란 독일공군 전투기들의 지원을 받은 기계화부대가 신속하게 적진을 돌파한다는 것에 기반을 둔 전술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Le côté psychologique comptait beaucoup aussi. «Leurs films de propagande mettaient toujours en valeur les chars et les avions», indique Wojtek Lietz, expert polonais
심리전이라는 차원도 많이 고려된 것이다. «독일 선전 영화들은 항상 전차와 전투기의 가치에 비중을 두었다.» 라고 폴란드 전문가, 리츠 가 지적하고 있다.
L'Allemagne, forcée à se démilitariser à l'issue de la Première guerre mondiale, a rapidement renouvelé sa puissance militaire dès l'arrivée d'Adolf Hitler au pouvoir en 1933. Les autres pays ont manqué l'occasion. La Pologne prévoyait notamment de mieux motoriser ses troupes vers 194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장해제를 강요 받았던 독일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시점으로 재무장을 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다른 나라들은 이렇게 하지 못했다. 폴란드는 1942년까지 자국 군대를 보다 기계화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Mais le rôle des chevaux pendant la guerre est loin d'être mythique. En 1939, la Pologne disposait de 320 000 cavaliers mais les chevaux servaient surtout à transporter les troupes.
아무튼, 전쟁 동안 기병의 역할은 위의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1939년,폴란드는 32만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기병은 주로 군대를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La cavalerie était formée et utilisée comme une infanterie à cheval. Les cavaliers n'étaient pas censés se battre à cheval. Ils en descendaient avant de se lancer dans la bataille», souligne Jan Szkudlinski du musée polonais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당시 기병은 말을 탄 ‘보병’처럼 훈련을 받았고, 이용되었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말에서 내렸던 것이다.»라고 폴란드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의 얀 츠쿠드린스키 가 강조했다.
Parfois seulement, ils retrouvaient la tactique traditionnelle pour charger contre les troupes allemandes. Cela a eu lieu une vingtaine de fois. Et, en dépit de son image haute-technologie, l'armée nazie comptait environ 200 000 cavaliers.
물론 때로, 폴란드 기병이 독일군 공격을 위해 전통적인 기마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은 스무 차례에 불과했다. 그리고, 높은 기술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독일군도 대략 20만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Une confrontation directe entre cavaliers polonais et allemands a eu lieu notamment à Krasnobrod (est), le 23 septembre, deux semaines avant la capitulation de la Pologne.
실제로, 폴란드 와 독일 기병대간의 직접 충돌이 9월 23일 폴란드 동부의 크라스노브로드 에서 있었고, 이것은 폴란드 항복 2주전에 있었던 전투였다. [역자주 – 크라스노브로드 전투
Samedi 23 septembre: le 25ème régiment de lanciers polonais charge à cheval les éléments avancés de la 8ème division d’infanterie à Krasnobrod. L’unité de reconnaissance de la division allemande contre-attaque, également à cheval : c’est l’un des derniers combats de cavalerie de l’histoire. Le dernier mot reste aux Polonais.
9월 23일 : 크라스노브로드에서 폴란드의 제25 창기병 연대가 전선의 제8보병사단의 보급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들을 독일군의 수색대가 발견, 말을 타고 공격했다. 이것은 역사에서 마지막 기마전들 중 하나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가 승리했다.]
«À l'est, il n'y avait pas de bonnes routes», rappelle M. Lietz. Les chevaux étaient bien adaptés à ces terrains sablonneux. On l'a vu lors des batailles de la guerre polono-soviétique de 1919-1921. Plus tard, la Wehrmacht et l'Armée rouge ont utilisé le cheval après l'invasion allemande de l'URSS en 1941.
«폴란드 동부에는, 상태가 좋은 도로가 없었다»고 리츠 가 회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병들은 이런 모래밭에 잘 적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폴란드 기병의 면모를, 1919년-1921년 폴란드-소련 전쟁 동안의 전투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1941년 독일군의 소련침공 에서도, 독일군 과 소련군은 기병을 이용했다.
Les chevaux ont combattu aussi sur d'autres fronts. La cavalerie allemande a été la première à atteindre les berges de la Seine en 1940. Les cavaliers américains et britanniques ont combattu les Japonais aux Philippines et en Birmanie.
기병들은 다른 전선에서도 싸웠다. 1940년 프랑스의 세느강 강둑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 독일 기병이었다. 미국 과 영국 기병들은 각각 필리핀과 버마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L'historien londonien Adam Zamoyski a encore une explication de la vitalité du mythe: «Les gens aiment les histoires simples, surtout quand elles représentent d'autres nations comme étranges et un peu inférieures».
영국 런던의 역사가인, 아담 자모이스키는 이 신화가 아직도 유포되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순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특히 이 이야기들이 외국의 그리고 약간 열등해 보이는 다른 나라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폴란드군은 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게 용맹히 분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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