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네 집이 엉망이 되어 있더라. 너무 놀라서 빛을 비추어 보니 몽실몽실한 궁둥이가 보였어. 네 다리가 그렇게 길쭉하니 예쁜지 몰랐는데.. 설마설마 하는 떨리는 마음과 손으로 살펴봤더니 이미 늦었더라 침으로 범벅이 되어, 내 뺨을 스치는 바람만큼 차게 식은 너를 보며 드는 여러가지 생각에 현실감각이 떨어져서 차마 눈물도 나지 않더라 그 와중에도 묵직한 무게감에 짜식 잘 먹고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껌딱지였던 아기 시절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손 타는 것을 질색하던 너를 이제서야 오랜만에 찬찬히 구석구석 살펴봤는데.. 야 너 참 예쁘더라. 뉘집 애인지 참 오밀조밀하니 예쁘게 생겼더라. 눈을 감겨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시도는 했는데 안 감기더라고.. 매정한 엄마 탓에, 욕심 많은 형제들 탓에, 유난히 작았던 몸 탓에, 구석으로 밀려나 빌빌거리던 네가 자꾸만 눈에 밟혀서 손바닥 반만 하던 너를 겨우내 내 방에서 악취를 참아가며 키웠더랬지. 신경을 쓴 만큼 무럭무럭 자라서 강아지만큼 커진 너를 보면 참 뿌듯했어 토끼 주제에 당근보다 사과를 좋아하고 오줌 소리도 굉장했었지. 금슬이 얼마나 좋은지 자꾸 자식을 봐서 와이프랑 떼어놓았더니 밥그릇 위에 올라 앉아 시위하고 망을 사이에 둔 채 둘이 기대어 있던 너. 손바닥 위에서 장난치다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앉아 잠들던 어린 시절의 너. 토끼는 처음이라, 너 잘 키워보겠다고 공부도 엄청 했었는데ㅋㅋ 그저께 배 깎아먹고 껍질 예쁘게 손질해서 말려뒀는데.. 버려야 겠다. 너를 떠나게 한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 어쩌겠니.. 화는 나지만, 본능인데. 근데 걔네 주인은 용서가 안된다.ㅋㅋㅋ 어른이고 뭐고 나 엄청 지랄했는데. 너 나 그런 모습 처음 봤지? 있잖아, 지난 십년 가까이 참 고마웠어. 수고 많았다. 진짜 미안하고 염치 없지만 다음번 네 생에 한번만 더 나랑 인연을 맺어주면 안되겠니? 못해준 것들만 자꾸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걸 보니 네가 내 생에 스쳐간 시간의 길이, 그 이상으로 네가 참 깊었나 보다. 고마웠어 진짜 고마웠어 네 덕분에 많이 웃고 또 행복했다 안녕 잘가. 나중에 나랑.. 또 만나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