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비하면 요즈음 우리나라는 정말 잘살게 되었다. 만일 지금의 상황을
비디오로 찍어 60-70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시대의 사람들이 화면을
통해 보는 이 세상은 정말 별천지와도 같이 느껴지리라.
그러나 모든 이가 다 잘살게 된것은 분명 아니다. 적어도 사회의 일부분은 옛날
그 어려웠던 시절과 흡사한 상황을 겪고 있으며 오히려 상대적으로 혹독해진
빈곤에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자본주의의 모순, 분배의 불공정, 독재와 인권...
이런 단어들이 자주 회자되던 시절 젊은 가슴에 뜻도 모르면서 가슴에
분노가 일었던 적도 있었다.
그시절, 승용차를 가지고 고급 카페를 드나들던 친구를 마음속 한
편으로는 부러워 하면서도, 달동네 철거민촌을 다니며 가난함
속에서 오히려 좋은 의미를, 반대로 부유함속에서 온갖 추한 의미를
찾으려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문득 가난함이란것이 반드시 가진 돈이 얼마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가난과 부유함의 잣대가 단순히 돈으로만
계산되어질 수 있는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그 가난하고 못사는 철거민 촌에도 분명히 부자와
가난한 자는 존재했다. 가진 돈의 많고 작음을 떠나 부자인자는 정말
부자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가난한 자는 정말 거지로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달동네 이집 저집을 많이 다니면서 나름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먼저 부자인 사람의 집을 보면 아무리 집이 좁고 허름해도 깨끗이
정돈이 되어있다.
음식하나를 해 먹더라도 상에다가 차려서 깨끗이 먹으며, 결코 상해
서 버리는 음식이 없다. 청소도 잘되어 있어 특히 아무리 허름한
장농이나 책꽂이,경대라도 윗면까지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다.
집이 좁으니 침대는 못 놓더라도 이불을 가지런히, 깨끗이 개어
놓는다.
돈이 없다보니 여기저기서 생기는 집안의 고장난 부분, 허물어진
부분은 재시공은 못해도 임시변통으로나마 열심히 고쳐져 있다.
전등갓도 하나의 판단기준이다. 전등갓위도 먼지 하나없이 깨끗하다.
그런집의 주인(세입자든 아니든 그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보면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행동거지가 민첩하며 발음이 또박또박하다.
물론 옷차림 또한 비싼 옷은 아닐지라도, 또 구멍난 옷일지라도
깨끗하게 기워서 입고 있다. 사람을 대하는데 다뜻하며, 예의를
차릴줄 안다.
이제 가난한 집을 살펴보자.
일단, 가난한 집은 청소와 정리정돈이 안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안 구석구석에 먼지가 쌓이고 뒤엉켜있으며 체납된 영수증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다. 고장난 수도 꼭지나 가구, 가전제품등이 몇달째
그대로 있고 찢어진 옷을 웬만하면 그대로 입는다. 집에서는
아무렇게나 더럽고 헤진옷을입고 지내며 음식을 잊어버리고
상하게 해서 버리는 일이 잦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은 목소리가 크며, 말투도 상당히 거칠게 마련이다.
가난한 것이 무슨 유세인양 자신감이 넘쳐 다른이들의 시선에는 아랑곳
안하고 부끄러운 일을 거침없이 해댄다. 이런 부류들은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것이 실례가 되는일인줄 전혀 모르고 오히려 그것이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한해전에 전세를 들어간 집이 있었다. 소위 버스종점 뒷집이라 전세가
싼것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전에 살던 사람들은 더 큰집을 구해서
나간단다. 이삿짐을 들고 문을 연 순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장판까지 거두어간 집안은 페허, 쓰레기장 그 자체였다.
이삿짐을 밖에두고 장판을 새로 사다 까는동안 이삿짐 센터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지만, 전에살던 이들이 그 장판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소위 나의 10원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이의 1000원 손해는 아랑곳 않는
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정말 가난을 거두어간 장판처럼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이웃과 주차문제로 큰소리 내는것이 싫어 아예 차를 주차공간이
넉넉한 형집에 위탁해 버렸다. 그후로 자주 택시를 타지만, 한번도
어서오세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안녕히가세요. 이런 인사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택시운전 하는것이 무슨 죄인양 아무렇게나 손님을
받는 그들의 태도가 바로 진정한 가난이다. 택시운전도 엄연히
떳떳한 직업중의 하나이고, 나는 택시비를 냈으니, 그들도 당당히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국제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지하철 안내 방송은 비록 기계음
일지라도 어여쁜 여자 목소리가 안내해주는데, 이것이 가끔 고장이나
착오를 일으켜 전동차를 모는 이가 직접 육성으로 해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발음은 항상 불분명하고 초보 복화술사처럼 지지지
댄다. 가끔씩 무슨 당산철교 공사가....매우 죄송합니다...다소
불편하시더라도...이런 방송이 나올때가 있는데 전혀 미안한
말투가 아니며 귀찮다는듯이 내뱉는 그 발음또한 알아듣기가 힘들다.
일본 지하철을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일본 지하철의 안내 방송은 남자
목소리로 나온다. 일본 지하철에서도 가끔씩 육성 안내가 나오는데,
비록 좋은 성우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한결같이 또박또박한 소리로
방송한다. 일본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서울 지하철과 비교는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가 진정으로 잘 살려면 잘사는 척을 해서는 안된다. 실은 못사는데
잘사는척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수백 수천짜리 옷사입고 기억짜리 차타는 사람들만 정신차리면 되느냐 하면
천만에 말씀. 바로 내가 달라져야 한다.
삼천짜리 전세살면서 같은 배기량을 가진 고급차를 사고(정말 없을것 같수?
실제로 많다우), 백만원 월급에 승용차에 스키 캐리어 달고 가면서
이거 사치한 스포츠 절대 아냐, 돈 십만원 밖에 안들어 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다.
쓰레기 치우는 미화원들. 쓰레기 봉투값은 어디가고 수고비(주로 '막걸리값'
으로 통한다) 따로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 허가 내는데 먼산 쳐다보며
내월급이 좀 적어야지 하면서 봉투요구하는 공무원들.
정말 가난한 자는 가난을 부끄러워 하며 그것을 피하고 감추려는
자들이다.
기억짜리 차타고 다니는 싸장님서부터 환경 미화원까지. 그리고 나 자신.
오늘도 가난을 피하려고, 잊어버리려고, 도망가려고 애쓰지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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