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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써온 글이 하나 있습니다.
1권 자체는 상당히 빨리 끝나서 2개월 만에 후다닥 썼는데, 처음엔 라노벨로 갈까 해서 상당히 유치한 맛이 있습니다. -_-;;
그러나 구성이 갑자기 10권까지 늘어나고, 그 전체적인 흐름이 '경제학'이라는 하나의 영역이 거미줄의 중심처럼 꽉 잡아줄 때
'와, 시바! 이거 잘만 하면 왠만한 경제학설사보단 재밌을듯'이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가려고 하니 처음에 복선이나 전개를 상당히 바꿔야 하더군요.
근데 그 바꾼다는 게 1년 넘게... 1권이 아직도 완성이 안되었습니다. -_-;;(틀을 바꾸느라고 싸그리 고치고 있어요.)
여러분은 SSF 소설이라고 아시나요.
사회과학소설입니다. SF 소설이 아닙니다!(라지만 약간 SF적인 면도 있긴 함. -_-;;)
우선 시간을 언급하자면..(괄호 안은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경제학 영역)
1권 - 2037년(경제학원론)
2권 - 2040년(미시)
3권 - 2044년(거시)
4권 - 2046년(무역, 금융)
5권 - 2047년(+2025년)(경제학설)
6권 - 2020~2025년(제도주의경제학)
7권 - 2048년(행동경제학)
8권, 9권, 10권 - 2049~2050년(종합, 즉 모든 경제학이 다 나옴)
여기서 세계관에 핵심이 되는 것은 '다극화 추진 위원회'라고 하는 비밀결사단체입니다.
이 이상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고..
아무튼 위 소설은 통칭 '위원회'라고 하는 비밀결사단체의 존재에 근거하여(현실에는 이런 단체 없지만요)
1. 중국과 미국 경제의 '동시' 붕괴
2. 한국의 대규모 두뇌 유출 사건(6권의 배경. 이공계 출신 엔지니어나 과학자들이 대규모로 국외로 이탈)
3. 유로화 존속
4. 한국 내 제도주의 학파의 급부상
5. 제도주의 학파의 한계와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으로 인한 제 3차 세계대전 발발(8, 9, 10권)
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1~7권은 '어째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는 프롤로그(?)격 얘기고 본편은 8, 9, 10권이라고 봐도 될듯.
등장 인물 중 중요 인물들은 각각 저마다 한 명씩 경제학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백향 -> 애덤 스미스
차유라 -> 맬서스
김준구 -> 케인스
서수진 -> 밀튼 프리드먼
현경화 -> 마르크스
남철수 -> 슘페터
박혜원 -> 칼 폴라니
오카자키 레이 -> 하이예크
김하준 -> 베블런
김버들 -> 존 내쉬
오카자키 아키라 -> 존 스튜어트 밀
손은하, 손은희 자매 -> 갤 브레이스
민은선 -> 케네스 에로우
시작과 끝 -> 알프레드 마샬
시작과 끝은 아직 이름을 못 정했어요... 작중에 나오는 코드 네임임.
참고로 저도 본명으로 등장합니다!라지만 저 위엔 없어요.
아무튼...
1권을 다 쓰게 되면 인터넷에 올려볼 생각입니다.
물론 제 블로그에 가장 먼저 올리고, 그 다음엔 링크를 걸지 소개글을 올릴지 전문을 다 올릴지는 모르겠어요.
소설 1권 프롤로그랑 챕터6 Intro 보면 막장입니다. 처음 접하면 이게 무슨 소설이냐, 경제학 서적에서 복사한 거 아니냐 할 텐데..(좀 많이 인용하긴 했습니다..)
아.. 소설 맞습니다. 맞고요.
최대한 맛이 간 센스가 돋보이도록(?) 쓰긴 썼는데 과연 이걸 알아차릴지 그냥 모르고 지나칠지는 저로서는 알 수 없군요.
참고로 1권은 매우 소설다워서 경제학 얘기가 그다지 많이 나오진 않습니다.
하지만 6권에선.. 환상의 파티.. 등장 인물 얘네들 뭐 말만 하면 경제학 얘기 나옵니다.
우선 맛보기로(?) 1권 프롤로그만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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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capitalism survive? - Joseph Alois Schumpeter
21세기 초반. 세계경제의 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이고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1989년 12월 미소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사회주의는 붕괴하였으며, 자본주의적 국제경제질서 또한 급속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상호의존은 WTO를 출범시키게 만들었으며 통상마찰은 심화되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해졌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은 갈수록 약화되어갔으며, 유로화는 체제 존속을 위협 당했으나 끝내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빈곤과 부유함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며 상대적 박탈감은 젊은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통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도래한 것처럼 보였으며, 국제질서는 다극화 체제로 빠른 속도로 전환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좁아져 가고 국가는 경계를 허물어 나갔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자본이 전 세계에 쏟아져 나왔다. 분쟁, 갈등,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쟁이 종식되고 영구한 평화가 도래하리라 생각했건만, 유토피아는 생각만큼 그다지 쉽사리 도래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에 손쉽게 대답할 수 없다. 갈등은 가치관이나 시각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정말 아주 가끔은 말썽 자체를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갈등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서로 부딪치게 되는 시점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의외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각자의 입장은 어째서 어긋나게 되는지, 사람들이 왜 갈등을 빚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류가 걸어 온 길을 다시 여행해야만 한다.
葛藤은 근본적으로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어떤 종류의 불균형이든 그것은 갈등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권력, 소득, 자원, 재산, 명예 등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사유재산 제도가 형성된 이후로 평등하게 분배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희소성의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희소성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을 해왔고 이로써 경제가 창출되었다.
經濟는 生産, 分配, 交換, 그리고 消費라는 네 가지 분야가 상호 연관을 미치며 구성되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장기적으로 인류 경제구조의 역사는 생산 형태에 따라 나머지 구조가 결정되어 왔다. 희소성의 문제는 생산 문제의 변화에 따라 그 모양새가 끊임없이 변했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희소성에 맞서서 인류는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원시사회의 공동노동에서 출발하여 사유재산제도가 생기고, 계급이 파생하였다. 권력자와 피지배자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는 상당한 기간 존속되었으며, 권력자의 극점에는 왕, 피지배자의 극점에는 노예가 존재하였다. 노예제 생산제도는 오랜 시간 버텼으나 이내 무너지고 봉건제사회로 전환되었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쌓이게 되고, 이 축적과정은 봉건영주와 지주를 위협하였다. 마침내 봉건제마저 와해되고 세상은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초기의 산업화는 매우 열악하여 착취라는 말이 매우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균형적인 구조가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럽 열강의 산업혁명 때문에 생산과잉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불확실한 경기변동을 거치다 마침내 세계대공황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불구덩이로 가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세계는 다시 냉전을 거치고, 마침내 그 냉전마저 무너졌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었다.
21세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시대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키게 만든 시대이기도 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기변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도 자기조정 메커니즘이라는 그 힘이 쇠퇴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필름을 되감기했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째서 유토피아는 도래할 수 없었는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자원은 희소하기 때문이다. 희소한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하는 것은 여태껏 성공한 적이 없다. 현재의 인류를 지탱해온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을 도구로 하여 지금껏 버텨왔다. 이는 역대 인류가 창조한 제도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이며 가장 뒤늦게 출현한 부분이다. 이는 굉장히 효율적이나, 공평함은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경제를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메커니즘과 관련된 경향이 인류를 지배하기 직전에 이르렀다는 데 동의하였다. 우리가 형평성과 같은 가치를 너무 헤져서 입을 수 없게 되어버린 누더기를 버리듯 내팽겨 칠 수 있다면 우리는 마냥 맹목적으로 시장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럴 수 없었다.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과 그 경향의 진보속도를 늦추어보려는 노력이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맞물렸다.
보아라! 위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왔다. 그럼에도 발전 속에 흔히 일어나는 부작용과 고통이 별 거 아니라고 할 사람들 덕분에 인류는 최후의 위기 앞에 서게 되었다. 우리는 눈가리개를 하고 귀마개를 하며 무지개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 절벽 앞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경향성이 어차피 일어날 일이면 그 경향성에 저항하는 것조차 무의미하지 않는가? 그 경향성의 끝에 다다를 종착역은 궁극적으로 좋은 곳이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낱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이란 유혹에 굴복당한 사상적 꼭두각시이거나 가시밭길을 걸을 의향이 있는 순교자이거나 둘 중 하나다. 천국에 가봤는가? 언젠가는 그곳에 갈 거라면 죽음에 대해 저항하는 것조차 무의미하지 않는가? 인생의 끝에 다다를 종착역은 궁극적으로 좋은 곳이지 않느냐? 당신은 이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판단이 안 되는가? 대물림되는 사회계급, 고전학파가 내세웠던 공리는 파탄으로 가는 길목에 나침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근대 경제 학설의 전통 전체가 경제를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여러 시장들의 맞물린 체제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에 경제는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었다(embedded). 경제라고 하는 것은 정치, 종교, 사회관계에 從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시장 거래가 신뢰, 상호 이해, 계약의 법적 강제 등에 의존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 버릴 결과가 나오는 이야기다. 이는 社會가 市場에 딸린 附隨物로서 운영되게 된다는 엄청난 사태를 뜻한다. 이것이 「엄청난 사태」라는데 감이 오지 않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엄청난 사태가 연속적이고 멈춤 없이 일반적인 것 마냥 굴러가는 사회에서 쭉 생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종복이 주인을 붙잡아 버린 격이다. 그러나 자기조정적인 성격을 갖는 시장경제를 달성한다는 목표가 유토피아와 같은 기획, 즉 현실에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를 창출하려면 인간 존재와 자연 환경이 순수한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이 필수인데, 이렇게 되면 사회, 자연 환경이 확실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다. 자기조정 시장 이론가, 이른바 자유주의자 내지 신자유주의자는 사회를 낭떠러지로 몰아붙인다.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조류를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조류는 이들이 추구하는 허구적 청사진이 현실과 오버랩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대중을 설득하고 고위 관료를 가르쳤다. 그러나 허구적 청사진은 현실과 오버랩이 될 수 있을 수 없다.
이들이 제시한 경향성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혜택, 더 나은 물질문명으로 이끌어주었지만, 이들은 피와 눈물과 고통과 비명을 동반하였다. 그리고 후대는 쉽게 그 아픔을 잊었다. 우리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은 악마의 맷돌에 갈렸었다. 콩을 넣고 맷돌에 갈면 그 결과물은 음식물로 탄생하게 되지만, 맷돌에 갈린 콩의 운명은 결국 버려지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우리는 이제 그 아픔을 모른다. 더 교묘하고 더 은밀하게 맷돌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피와 눈물과 고통과 비명이 아니라 魂이 갈릴 지경에 이른 건지도 모른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를 창출하려면 인간 존재와 자연 환경이 순수한 商品으로 전환되는 것이 필수인데, 이렇게 되면 사회, 자연 환경이 확실하게 파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장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분명해지면 사람들은 저항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마치 절벽 끝에 떼를 지어 달려가 떨어져 죽는 쥐떼(lemming)처럼 움직이길 거부한다. 그러나 유토피아 기획가들은 잔혹하게 이들을 몰아붙인다. 시장 논리와 그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민중에게 강제하려면 국가 통치의 기술과 억압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사회의 이중적 운동이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뭐든지 좋은 건 극대화를 원했다. 이익, 이윤, 이자, 심지어 행복까지. 그러나 효율을 원하면서 사회는 망가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맞선 운동, 이른바 사회의 자기 보호도 시작되었다. 때론 인위적으로, 때론 너무나 자연스럽게. 때론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서, 때론 피를 흘린 혁명을 통해서. 사회에서 경제를 뽑아내려는 시도란 으레 필연적으로 저항을 만나게 되므로 시장 사회는 반대방향의 두 운동으로 구성된다. 시장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자유방임 운동, 경제를 뽑아내는 것에 저항하면서 출현하는 사회 보호의 반대 운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자기 보호 메커니즘은 시장의 자기 조정 메커니즘에 비해 힘이 없어 으레 실패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자기애는 사회적 운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더 공평한 세상이 되길 바라였다. 사회의 자기 보호 메커니즘은 마치 기름칠을 덜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메커니즘은 끝내 융화되지 못한 채 소용돌이를 만들어 버렸다. 이 소용돌이는 몇 차례의 전쟁을 끝으로 사라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최근 그 소용돌이는 다시 커지기 시작하였다. 이 소용돌이는 마침내 마지막 전쟁을 예고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양쪽 운동 모두가 위기에 대한 각자의 해결책을 강제할 수 있는 상태라면 긴장만 증가하여 마침내 파시즘이 권력을 잡게 되고 자유방임과 민주주의 양쪽 모두와 단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가 만약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해결책을 못 찾고 파탄의 시대로 도래할 첫 걸음을 뗐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만약 이 난국이, 사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별 거 아닌 무용담 정도로 남게 될 짧은 서사시라면, 우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시대는 파탄으로 가는가, 중립을 유지하는가, 발전하고 있는가? 어떤 경향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그 경향으로의 진보속도를 늦추어보려는 노력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가? 그러한 조치들은 실제로 그러한 변화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바로 이렇게 속도를 늦추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조치들의 진정한 목표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인가? 어떠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완전히 멈추지 못했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아무 결과도 낳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떨 때는 변화 속도가 변화의 방향 그 자체만큼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은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지만, 그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속도를 허용할 것인가는 우리의 뜻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누군가는 이미 시대가 악마의 맷돌 속으로 이끌려 간다고 생각하고는 집단을 이루어 이 경향성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사실 싸운 게 아닌지도 모른다. 이 경향성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경향성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든 게 탄로 나게 되는 순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돌아보기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으려 애썼다. 이와는 반대로 이 경향성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집단 또한 있었다. 아직은 어느 누가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 서로 자기가 옳다는 논증은 있지만 대규모로 실험된 적도 없으며, 어느 정부도 전적으로 한 경향성만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끝내 모두 실패하거나 엇나갔다. 그 실패와 왜곡과 어긋남이 새로운 파탄의 시대로, 새로운 난국의 소용돌이로 이끌어 버렸다.
그리고 이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보고서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다음 다섯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길 바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이끄는 경향성 혹은 우리가 걷고 있는 경향성은 어디를 향하는가?
우리는 너무 빨리 뛰는 건 아닌가?
우리는 너무 천천히 진실을 깨닫는 건 아닌가?
우리에게 아직도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닐까?
『Political Economy of Old Capitalism vs. Modern Socialism』
PART ONE The End of STATUS QUO
Chapter I Introduction
written by 「Last Capitalist」
January 1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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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것이 프롤로그임... -_-;;
현재까지 1권 원고지 분량 1776장 달성..
그나저나 여기 분명히 경제 게시판인데 다들 주식, 등산, 돈 얘기만 하시네요.
뭐.. 확실히 주식이 경제의 영역에 포함되긴 합니다만.. 왠지 모르게 씁쓸함.
추신. 추천할 만한 악당 이름 있으면 알려주세요. 군대에서 보았던 엿 같은 선임 이름이어도 상관없음.(어차피 제가 본 사람인 것도 아닐테고.)
이염갑은 이미 최악의 악당으로 나옴.(이름의 위치를 자아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