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난다는 분들이 계셔서 이어서 써 봅니다.

1996년 8월...

나는 드디어 악몽의 2함대를 떠나 원하는대로 1함대로 발령이 났다.

보통 인사(人事)는 사령부 인사과에서 하지만

사통, 병기, 유도 등 무기직별은 독특하게도 사령부 무기과에서 인사 업무를 맡는다.

2함대 내에서 발령이 났다면 필요 없는 절차지만

타함대에서 1함대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일단 사령부 무기과를 거치게 된다.

나는 1함대 사령부 무기과에 가서 선배들께 인사를 드리고 커피를 얻어 마시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무기과에 있는 선배들은 기본적으로 군생활이 15년 이상은 된 분들이니

나에 대해서는 그들의 정보력으로 이미 꿰뚫고 있었다.

무기과에서는 내게 고속정 근무를 추천했다.

원래 고속정엔 사통 중사가 근무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하사인 나를 고속정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나를 잘 본 선배가 나를 진급 시키기 위해 꼼수를 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뭐가 씌었는지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살면서 후회란 것을 오래 해 본 적이 없지만

그 때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은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결국 나는 8월 16일에 마산함으로 부임했다.

운이 좋았던지 평소 나를 좋게 봐 주시던 분이 사통장을 하고 계셨다.

게다가 4기수 후배들이 네명이나 타고 있었다.

이제 나는 후배들을 감독하며 적당히 게으름만 피우면 되는 상황이었다.

1함대에서의 생활은 여유가 넘쳐 흘렀다.

1주일 출동에 1주일 정박.

그리고 1함대 수리창에서 자체 수리.

이런 꿈 같은 파라다이스를 두고 내가 왜 2함대에서 그 고생을 했나 싶었다.

그렇게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전대 기동훈련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날 잡힌 대잠 훈련을 마지막으로 피곤한 훈련이 모두 끝나고 입항을 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새벽 4시까지 당직을 선 후 침실에서 설풋 잠이 들었다.

후배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지만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글로 하사님... 일어나십시오"

"어........... 뭐야?"

"일어나셔야 됩니다"

"어........... 벌써 당직 교대해야 되냐?"

"그게 아니구요..."

"........ 지금 몇시냐?"

"다섯십니다"

"하아... 씨발... 근데 왜 깨우냐?"

"일어나서 장비 작동 좀 해 주십시오"

"어??????"

"일어나셔서 장비 작동 좀 해 해 달라구요"

".............. 뭔 소리냐?"

"장비 작동을 해야 하는데 글로 하사님이 필요합니다"

"............... 뭔 개소리야? 넌 장비 작동 할 줄 몰라?"

"할 줄 압니다"

"근데?"

"그래도 선배님이 직접 하시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좆까고 있네..... 넌 씨발놈아..... 장비 작동을...... 할 줄 몰라서..... 방금 전까지 당직 서고 내려온 나한테...... 장비 작동을 해 달라고 하냐?"

"그게 아니구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가 작동 해 새꺄"

"아이... 그래도 선배님이 계셔야 합니다"

"씹소리 떠들지 말고 올라 가라고..."

"...선배님..."

"씨발놈이 장난하나? 안 올라가?"

"그게 아니고... 당직사관이 선배님 불러 오랍니다"

"당직사관이 누군데???"

"전정관(전투정보관, 중위)입니다"

"야, 까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필요하면 직접 와서 깨우라 그래. 나 잘테니까 꺼져"

후배는 한참 동안이나 내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자기 동기 4명 중에서 주관이 가장 뚜렷한 놈이

희한하게도 내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처음엔 책임질 일을 떠맡지 않으려는 꼼수로 여겼지만

2년 넘게 같이 근무하다보니 그놈은 나를 믿고 진심으로 따르는 거였다.

난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고 상황실로 올라갔다.

전정관을 나를 보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대뜸 IR(적외선) 카메라를 작동하란다.

"어 글로 왔냐? 가서 IR 카메라 좀 작동 시켜 봐"

"왜요?"

"그걸로 잠수함 좀 찾아"

"......????"

"잠수함이 있나 좀 찾아 봐"

"IR은 적외선입니다. 투시 카메라가 아닙니다"

"그건 아는데... 그래도 연통 같은 거 올라오면 보이지 않냐?"

"보이긴 보이죠"

"그럼 좀 찾아봐봐"

"에휴..."

그날 마지막 훈련으로 대잠 훈련이 예정돼 있긴 했지만

깜깜한 새벽에 적외선 카메라로 잠수함을 찾으라니...

시키는 사람이나 나나 서로가 말도 안되는 얘긴 줄 뻔히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장비를 작동 시키고 의미없이 적외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렇게 한시간 쯤 흘렀을까?

"글로, 이제 됐으니까 장비 끄고 내려가서 자"

"네. 근데 무슨 일이랍니까?"

"잠수함이 넘어 왔다나봐"

"대잠 훈련은 이따 오전이잖아요"

"아니, 북한 잠수함"

"!!!!!!!!!?????????"

"강릉 앞바다에 좌초가 됐다는데, 혹시나 다른 놈들이 또 있나 싶어서..."

"우리 이제 좆된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수고하십쇼"

"어 그래 수고했다. 잘 자"

1996년 9월 18일.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부터 나의 군생활은 다시 2함대 시절로 돌아가게 됐다.

북한 해군놈들 때문에 1함대로 왔더니 잠수함 침투라니!!!!!!

나중에 전역 후에 당시 그지역에서 육군으로 근무했던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겪은 고생은 고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육상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도 몰랐다.

인터넷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을 볼 짬도 없이 바쁘고 힘들었으니까...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 가던 어느날...

드디어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내려졌던 진돗개가 풀리고

영외거주자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퇴근을 준비하던

1997년 6월 22일 오후 4시 45분...

현문의 함내용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필승! 현문 부직사관입니다!"

"어. 부직사관 나 부장(부함장)인데..."

"네 부장님"

"지금 영외거주자들 퇴근했나?"

"아니오. 아직 후갑판에 있는데요"

"어. 그럼 지금 바로 출항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아무도 못 나가게 해"

"네. 알겠습니다. 근데 무슨 일입니까?"

"북한 잠수정이 속초 앞바다에서 꽁치 그물에 걸렸단다"

"이런...."

"아무튼... 영외자들 아무도 못 나가게 하고 지금 바로 영외자 대기하라고 방송해"

"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선배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야, 뭐라노? 나가라카제?" (야, 뭐라고 하디? 나가라고 하지?)

"아니오.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데요"

"뭐라카노? 장난하지 말고 똑디 말해봐라"

"진짠데요"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선배들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마이크를 잡고 힘차게 방송을 했다.

"알림!!! 영외거주자를 포함한 함 총원 이 시각 이후 함내에서 대기할 것! 이상! 당직사관!"

다행히 6월 22일 사건으로는 진돗개 발령과 같은 특수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영외거주자들은 연신 "씨발 씨발"을 외치면서 돌아다녔지만...

군에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지만

9.18 잠수함 침투사건과 6.22 꽁치어선 북 잠수정 포획사건은

날짜 뿐 아니라 시간까지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