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은 아버지와 같은 대학 같은 과를 갔고, 군대는 아버지가 공군 나오셨다고 나도 공군으로 갔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때도 아버지가 다니셨던 회사를 택했다.
회사안에서도 아버지가 하셨던 똑같은 일을 지원했다.
그렇게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와 좀 더 많은 대화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속만 썩이는 아들로서 아버지께 할 수 있는 작은 효도였다.
아버지는 인생의, 학교의, 군대의, 회사의 선배로서 나에게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내가 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여러가지 조언을 해 주셨다. 내가 하는 일에 아버지 만한 전문가를 국내에서 찾기도 힘들었지만 나같은 사회초년병이 그런 전문가의 가르침을 받기도 어려운 일인데 나에겐 행운이었고 아버지께는 또다른 즐거움을 드릴 수 있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셨다. 처음에 전이되지 않아서 간단히 수술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수술후 합병증으로 한쪽 폐의 1/3만 남기고 나머지 폐를 모두 못쓰게 되셨다.
무려 4개월을 의식없이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1개월을 의식이 돌아오셔서 중환자실에, 1개월을 일반병실에 계시다가 집에 산소호흡기랑 다 설치하고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께 중환자실은 지옥 그자체였다.
집에서 6개월 정도 보내시고 암이 다시 재발하였다.
병원에 다시 입원하시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항상 같이 계셨다.
난 하루에 한번 정도 병원에 갔다. 어느날 처가집에 잠깐 가있을 때 밤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어머니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의사가 뭐라고 하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니 니가 와서 한번 얘기해 보라고.
마누라랑 급히 병원으로 갔다.
의사의 얘기는 암세포가 커져서 기도를 눌러 막고있어 위험하니 중환자실에 옮겨 호흡기를 삽입하자는 거였다.
안 그러면 오늘밤도 장담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중환자실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아는 나로서는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도 울면서 말 못한다고 나보고 말하라고 하셨다. 더이상 미룰 곳이 없는 큰아들인 나로서는 나에게 없는 형이 그토록 절실히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의사에게는 옮길테니 준비해달라고 하고 병실에 혼자 들어갔다.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중환자실에 가셔야 한대요."
"안가면 안되냐?"
"제가 아들 낳으면 그 아들 이름 지어주실 때까지 버티실라면 중환자실에 가야한대요."
"제가 아버지 나으시면 아들도 빨리 낳고 담배도 끊을테니 가서 조금만 견뎌주세요."
"네가 그런 소리하는 걸보니 내가 죽을 때가 됐구나"
순간 눈물이 나는걸 참으며 아버지께 무릎꿇고
"아버지 안돌아가세요 제가 아들나으면 그새끼 한양대 가는 것도 보셔야죠."
그리고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가셨고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버지 상태가 안좋아 의식이 있으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수면제로 계속 재우고 있었거든요.
몇주 후에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의사에게 한마디만 하고 싶으니 잠시만 아버지를 깨워달라고 부탁했고
의사는 상태봐서 그나마 괜찮을 때 깨워주겠다고 약속하고
며칠후 약속대로 의사가 깨워주려 했으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쇼크로 다시 정신을 잃으셨고
그리고 다시 깨우려는 시도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그때 내가 하려던 말은 사랑한단 말이었다.
그 짧은 말을 하려하니 그말을 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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