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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국 귀신을 대표하는 종류라면 처녀 귀신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특히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1873년 서유영이 쓴 야담집인 금계필담(金溪筆談)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원도 강릉에 살았던 최씨는 진사(進士 과거에 합격한 사람) 호칭을 얻은 명예와 풍부한 재물까지 갖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세 아들과 손자들이 두 눈썹 사이에 붉은 종기가 돋아나다가 피가 터지는 병에 걸려 모두 죽는 참변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최씨의 자손 중에서 남은 건 어린 손자 한 명 뿐이라서 최씨의 걱정이 매우 컸습니다.
때마침 최씨의 집에는 김씨 성을 가진 생원(생원과生員科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 한 명이 아내와 함께 식객(食客)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식객이란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계속 이어진 관습인데, 부자의 집에 살면서 음식과 잠자리를 얻는 대가로 그 집안 식구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하튼 김생원의 아내는 남편에게 “우리가 이 집에 살면서 최진사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그가 자손들이 죽어 괴로워하고 있으니 그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김생원은 “나도 알고 있소.”라고 대답했는데, 마침 그 모습을 최진사의 종이 보고는 주인에게 알렸고, 최진사와 그 아내는 서둘러 김생원에게 달려와 “우리의 어린 손자만이라도 제발 구해주십시오.”라고 빌었습니다.
처음에 김생원은 “나는 의원이 아닙니다.”라면서 겸손하게 거절했으나, 최진사 부부가 워낙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들이 불쌍해 보여서 “마당에 신주(神主 신의 이름을 써놓은 나무 조각)를 모시고 향불을 준비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도사처럼 의관을 갖춰 입고 자기가 직접 향불을 피우며 부적을 태우자, 갑자기 허공에서 신장(神將 장군 신) 한 명이 나타나더니 김생원 앞에 엎드렸습니다.
김생원은 신장에게 “이곳의 가토신(家土神 집을 지키는 수호신)을 데려오너라.”고 지시했고, 신장은 곧바로 늙은 가토신 한 명을 데려왔습니다. 김생원은 가토신을 보며 “너는 왜 이 집안 식구들이 죽어가게 내버려 두었느냐?”라고 꾸짖었고, 그러자 가토신은 “이번 일은 원한으로 인한 것이라 나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해명했습니다. 이에 김생원은 가토신과 신장에게 “그러면 원한을 품고 살인을 저지른 귀신이 있을 테니, 잡아오너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토신과 신장은 집안의 창고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창고 안에서 소름이 끼치는 음침한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가토신과 신장은 처녀 귀신 한 명을 붙잡아 김생원의 앞으로 끌고 왔는데, 그녀의 두 눈썹 사이에는 송곳 하나가 박혀 있고 피가 발까지 흘러 내려 있었습니다. 김생원은 처녀 귀신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도대체 너는 어떤 원한을 품었기에 최진사댁 식구들을 죽였느냐?”
그 말을 듣고 처녀 귀신은 이렇게 화를 냈습니다.
“나는 원래 이 집의 하녀였다. 최진사가 한 번 장난삼아 내 손을 잡는 걸 본 그의 아내가 나를 질투하여 나를 창고로 끌고 가서는 송곳을 내 두 눈썹 사이에 박고는 곡식 자루들로 쌓아서 막아 놓은 채로 창고 문을 잠그고 나갔다. 그래서 나는 선 채로 갇혀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갔다. 그 원통함을 품고 귀신이 되어서 복수할 때를 기다렸다가 최씨 집안의 운세가 기울자 이제야 원한을 갚으려 이 집 식구들을 차례차례 죽였다. 너는 내 일을 막지 말라.”
그러자 김생원은 가토신과 신장에게 처녀 귀신을 깊은 산으로 끌고 가서 큰 돌로 눌러 놓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처녀 귀신은 슬프게 울면서 날뛰다가 간신히 가토신과 신장에게 끌려가 사라졌습니다.
이 광경을 창 틈으로 보고 있던 최진사 부부는 벌벌 떨었고, 김생원은 그들에게 다가가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은 그 한을 풀지 못하면 반드시 복수를 합니다.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저 귀신은 다시 나와서 이 집 식구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최진사 부부가 창고를 열어보고 곡식 자루들을 헤쳐보자, 정말로 두 눈썹 사이에 송곳을 박은 채로 피를 땅까지 흘리며 죽어 있는 하녀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얼굴색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여 최진사는 크게 놀라서 시체를 집 밖으로 끌어내서 불태워 없애고는 김생원을 찾았으나, 김생원은 이미 아내와 함께 밤을 타서 집을 떠나고 사라진 후였습니다. 처녀 귀신한테 보복을 당할까봐 미리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의 힘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뛰어난 도인인 김생원마저 그 귀신을 50년 밖에 가두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출처 |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308~31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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