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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이라 자게에)
주말의 명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얼굴이 가까워 지면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 쪽으로는 알 만큼 아는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도 말이다.
내 또래의 가정에서의 성교육은 대게 이런식이다.
부모님의 성교를 통해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나도 그렇게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볼드모트처럼 부모님 앞에서는 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있다.
학교에서의 성지식에 대한 교육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돌아보면 정작 필요했던 것은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콘돔 사용법이라던지 피임법, 서로의 몸에 대한 자세한 구조와 강약점(?)이었지만 실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살면서 본 적도 볼 일도 없는 나팔관이나 난소, 배란 수정 착상같은 단어들의 나열 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중학교 즈음에는 이미 대부분의 친구들이 여성의 신체 구조나 결합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온갖 체위를 자세하게 그려가며 설명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동네에서 살던 한 가족이 이사를 가면서 여러가지를 버렸는데 그 중에는 표지에 예쁜 누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었고 마침 공터에서 피구를 하던 나와 친구들의 눈의 띄었다.
당시 우리의 이성에 대한 인식수준은 여자는 가슴이 나온다던지 섹스라는게 있다는 정도였다.
성장이 빠른 친구들은 코 밑이 거뭇해지고 여학생들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며 그런 변화를 목도한 우리는 서로의 몸이 다르다는 데에 슬슬 호기심이 생기는 그런 때였다.
하지만 왜인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고 대화를 피하는 주제인지라 허전한 호기심만 쌓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제에 한 발 깊이 알 수 있는 기회가 정말 우연히 나타는 것이다.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본능적으로 친구들은 놀이를 멈추고 그 책들을 모아 가슴에 품고 놀이터 담벼락 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 장소로 달려갔다.
풋사과.
세 글자가 또렷이 박힌 두깨가 얼마 되지 않은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 책은 파라락 넘기다 보면 중간중간 전라 혹은 아슬아슬하게 가린의 여자 사진이 풀컬러로 인쇄되어 있었고 그 사진들을 숨죽이며 감상하다가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는게 우리의 새로운 놀이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고는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코웃음도 안 나는 흔한 야설이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손만대면 신음을 터뜨리는 여자들과 했다 하면 어떤 여자든 실신시키는 주인공 뭐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때는 친구집에서 창고에서 잡동사니가 쌓인 통을 우연찮게 뒤적거리다 제목없는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흑인을 처음 본 날이었다.
부모님이 없는 친구집에 모여 제목없는 비디오를 숨죽이며 보거나 떨리는 마음으로 청계천에서 은밀하게 산 비디오에 두 시간동안 전원일기만 나와서 분개하던 것도 그 언저리였던것 같다.
결국 어떻게든 알게된다.
문제는 이런 '과외활동'이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섹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매체들은 점점 큰 자극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일본산은 상대를 엿보고 약점잡고 학대하는 데에서 만족을 찾는 변태스러운 전개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인 것에 대한 기준이 생기기도 전에 이런게 머리속에 먼저 자리잡는다.
다분히 연출된 장면이고 내용이고 전문 배우들의 연기지만 현실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대해 이상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히 강력하다.
실제 현실의 이성을 만나보면 허구와 현실의 간극을 좁히게 되겠지만 그 때까지는 상상속에 살 수밖에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채워주지 않은 호기심을 이런 허구로 채워야 하는 것이 우리 불행이다.
n번방 가해자나 피해자의 연령대가 어린것도 현실속 이성 경험이 부족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로 상상을 대체하지 못한 누군가가 상상을 현실로 바꾸려 했고 불행하게도 실현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상상이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가학적이라는 점에서 비극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과 지식과 상상의 빈 자리를 채운것은 서로 즐기고 존중하는 섹스가 아닌 자극적이고 비틀린 무언가였다.
상대방을 성인 기구로 대한 것을 섹스라고 불러야 할까.
불편하다고 현실을 외면한 대가란 늘 이런 식이다.
섹스는 늘 있었고 지금도 어딘가 누군가는 분명히 하고 있다.
먹고 싸고 자고 번식하는 것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로서의 숙명이다.
모래속에 머리를 쳐박은 타조처럼 아무리 덮고 눈을 감아도, 이성간의 만남은 불건전하다며 아무리 우기고 외면해도 이성간의 끌림에는 성적 매력이 포함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에 쓰레기가 쌓이는 것처럼 최선이 아니면 차선, 최소한 차악이라도 자리했어야 하는 공간을 외면하면 늘 최악이 들어선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던가.
n번방 사건 이후 불법 음란물 소지 유포 등등 관련 법안이 강화됐단다.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가해자도 강하게 처벌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상상을 심어 주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생각보다 세상이 크게 변했다.
더이상 우연찮게 입수한 야설을 가슴에 품고 몰래 숨어서 보는 시대가 아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보면 깜짝 놀랄만한 영상물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다.
부모님의 생각보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머리를 이상한 무엇인가가 채우기 전에, 즉 최악이 자리잡기 전에 누군가는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처벌도 중요하지만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성욕을 운동으로 승화하라는 말은 굶주림을 명상으로 이기라는 소리 만큼 현실성이 없다.
차라리 국가에서 나서서 만남과 데이트와 섹스를 교육 교제로 만들었으면 한다.
여자의 관점으로 여자를 위한 야동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굴복시키고 괴롭히는 교미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즐기고 대화하며 마음을 여는 그리고 화끈하게 몸도 여는 그런 야동.
서로 같은 지향점을 가진다면 분명히 서로 더 즐겁고 안전한 성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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