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기가 강우 집인가.'
강우가 여기 산다는 건 중학생 때 부터 알았다.
어제 헤어지자던 말,
분명 그 자식 혼자의 생각은 아니 었을 텐데...
그래.
그 자식 부모님이 그렇게 시킨 거겠지, 헤어지라고.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날 버릴 수 있지?
그렇게 잘해줬는데
그 자식 잘못도 모두 용서해줬는데
아빠 엄마가 공부 안하고 뭐하냐며 욕할 때도 그 자식만 생각했는데...
'도로 번호가... 4번? 4번 국도? 재수 없게.'
내가 죽을 도로의 이름을 살펴본다.
붉은 표지판에 4라는 큰 숫자가 쓰여져있다.
...
내가 잘못 한건 정말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픈걸까...
아직 인도에 멍하니 서있었던 나는
큰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아아아아아앙
'아, 귀아파.'
'죽을 때가 되면 이렇게 편한 걸까.'
정말 그렇다면 나만 죽을 순 없는데.
강우 그 자식도 힘들텐데, 차였어도 커플링까지 나눈 사이인데
그 자식도 편하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쾅!!
아스팔트 도로를 몇 번이나 구른 나는 눈을 힘겹게 떴다.
온통 붉은 하늘.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 했지만 손에는 감각이 가지 않았다.
고개도 돌릴 수 없어 천천히 시선을 옮겨 보니
내 팔과 다리, 몸뚱이 모두 트럭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게 마지막...
...
#5
우리 집은 공설운동장을 기준으로 남문에서 정확히 남쪽에 위치한다.
불과 작은 도로 하나 사이라서
고교 야구 시즌이 다가오면 온갖 함성 소리에 축포 소리까지 들린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나는 집과 공설 운동장 사이의 길을 걷는다.
"그러고 보니 이 도로 중학생 떄 부터 다녔던 것 같은데. 도로 이름도 모르네."
평소에는 신경쓰지도 않는 도로지만
규모도 클 뿐더러 운동장 앞길이라는데 생각이 미쳤을 때
갑자기 도로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안내판이라고 하나, 표지판이라고 하나."
"아, 4번 국도."
며칠 전에 어떤 여고생이 이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던데
도로 이름까지 분위기를 타니 으스스했다.
#1
"여기야, 여기~"
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손 짓 했다.
날씨도 썩 괜찮고, 이 놀이공원에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데이트하기엔 더 좋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귀찮을 뿐.
나는 민강우.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터라 이것 저것 정신이 없었다.
날 향해 손 짓한 여자 아이는 특이한 이름의 한송이.
중학교 때 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우리 둘은
중3이 되기 한 두달 전 사귀기 시작했다.
오늘의 데이트도 송이가 계획한 것으로 봤을 때
누가 사귀자고 했는지도 뻔할 뻔자.
"그래. 미안, 버스가 늦어서."
물론 거짓말이었다.
데이트에는 11시까지 오기로 했지만
솔직히 주말 아침부터 놀이공원까지 버스로 가는 것은
부지런 하지 못한 나에겐 매우 큰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는 친척형이 하는 PC방에 들러
1시간 정도 게임을 한 뒤 설렁설렁 걸어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 헤헤."
하지만 이 바보는 그저 웃어주기만 했다.
내게 화는 안나는 건지.
"화 안 나?"
"왜?"
"늦게 왔잖아. 벌써 점심 때야. 밥 먹었어?"
"아니. 헤헤. 그리고 네가 왔잖아. 오면 됐지."
"꽤나 긍정적이구나."
"응!"
나는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걷는다.
내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진 아이니까.
#2
"그저께 내가 늦었잖아."
"그랬나?"
벌써 까먹은건가.
"그저께 말이야, 늦었잖아."
"아.... 그랬었구나. 근데 왜?"
"그래서 선물. 미안해서..."
내가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새하얀 은으로 되어 있는 커플링.
밋밋할까봐 일부러 가운데 하트가 반짝거리는 반지로 샀다.
의외로 비싸지 않았다.
"은 커플링."
"응. 커플링이야. 우리 사귄지 한 달 반이 넘어가는데, 커플링도 없구나 싶어서 싼거 샀어."
"완전...."
"응?"
"완전 감동이야! 민강우 짱이다, 진짜!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하는거야."
"난 교실 간다. 숙제 있어서."
"조금만 더 있다가."
"숙제."
"쳇."
조금만 더 있다가라는 송이의 말을 뿌리친 채 숙제를 하러 교실로 올라갔다.
연애도 공부도 성가시긴 매한가지 같다.
송이가 웃는 모습에 나도 왠지 기쁘긴 했지만....
#3
"헤어져."
"응?"
"정말 너에겐 미안해. 넌 아무 잘못 없어. 정말로."
"왜?... 왜 그러는데?"
어느새 송이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속으로 우는 울음이 느껴진다.
커플링을 줬던 어젯밤, 야자를 끝내고 집에 도착해서 어머니와 크게 싸웠다.
성적하락이 그 이유였는데
어머니는 자꾸만 송이를 걸고 넘어졌다.
내가 머리가 나쁜 탓이라고 자학까지 해봐가며 반항했지만
결국 아버지께서 헤어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포기하자. 나도 송이도 요새 성적이 자꾸 떨어져가고만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선량한 여고생이 인생을 망친다면
난 정말 못난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송이를 만나자마자 말을 꺼낸 것이다.
"나, 연애라는 것도 몰랐고 고등학생 되면서 너무..."
"너무... 왜?"
"너무 복잡해 졌어. 정신이 없다고."
"내가.. 내가 불편하지 않게 할게, 귀찮게 굴지 않을테니까."
"아니. 니가 아무리 나한테 잘해줘도 난 그만큼 돌려줄 자신 없어."
"....."
그간 추억이 눈물로 흘러 내린다. 그녀의 얼굴에도, 내 마음속에서도.
그녀의 추억...
냉담하게 굴고 무뚝뚝하고 약속 시간에 맨날 늦고 잘 해주지도 않는 못난 나만 가득하겠지.
"미안한데. 다른...."
"잘 있어."
뜻밖에 그녀에서 나온 말은 울음소리가 뒤섞인 울먹임이 아니라
차갑고 냉랭한 한 마디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미안한 일이지만 나를 위해서도, 송이를 위해서도
철 모르는 어린 얘들의 사랑 놀음도 오늘로 끝을 맺었다. 뻔뻔하게 나 혼자서 말이다.
#6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내린다.
송이와 이별한 날, 마음 속으로 흘렀던 뜨거운 눈물이 아닌
두려움이 가득 찬 차가운 눈물이...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근육은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마치 누군가 발목을 꼭 잡고 있는 듯한 느낌.
"제발... 제발 움직여! 제발!"
-빠아아아아아아앙
트럭의 경적이 귓가를 울렸다.
나는 손으로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와
귀 아플 정도로 크고 높은 트럭 경적 소리.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이 4번 국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작정 차도를 걸었던게 잘못이었을까
집을 향해 오른쪽으로 꺾어지려는 골목 바로 앞에서
나는 지금 이렇게 묶여있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정말 몇 발자국만 가면 집인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기다리고 계시는 집인데...
...
...
아스팔트 바닥 아래로 정말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프지?'
'내가 편안하게 해줄게.'
난 그제서야 발견했다.
내 발목이 으스러지도록 꽉 잡고 있는
피투성이의 손목을,
그리고
그 손의 끼여있는
피묻었지만
아직 새하얀 은색의 하트 커플링을......
내 고개가 트럭으로 옮겨졌을 때
이미 트럭은 내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트럭의 오른쪽 옆 백미러 부근에 매달려 있는
한 소녀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출처
웃대 - 서효림A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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