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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윤정 기자
‘88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8년 10월. 이송 중이던 미결수 12명이 교도관을 제압하고 탈주도주해 일부는 서울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지강헌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이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됐다. 2006년 영화 <홀리데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지강헌사건의 피의자 중 한 명인 김성진씨가 사건 발생 26년 만에 전말을 언론에 털어놨다. 그는 “지강헌씨는 주범이 아니고 내가 탈주 사건의 주범이다. 교도관에게서 총을 빼앗은 것도 나고 지강헌씨는 호송차에서 몸싸움이 있을 때도 앉아있었다 ”며 “늦었지만 지강헌씨에게 미안하고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과거의 극단적인 행동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인질극을 벌이던 지강헌씨는 당시 경찰에게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를 요구해 틀어놓고 유리 조각으로 자해하던 과정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이 사건의 주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함께 인질극을 벌이던 한의철·안광술씨는 사건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망한 3명을 포함해 탈옥한 12명 중 김씨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재범으로 다시 수감된 상태다. 김씨가 탈주자 중 유일한 출소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건으로 25년 간 복역하고 지난해 출소했다.
사건이 있은 지 26년이 지나 서울 중구 정동의 경향신문사 빌딩 내 커피숍에서 만난 김씨는 40대 후반의 모습으로 당시 상황을 담담히 증언했다. 그는 “내가 가장 나쁜 놈이다. 범행 모의도 저와 강영일이 시작했다. 당시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지씨에게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지강헌사건의 주범은 나다. 애먼 사람이 나로 인해 죽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탈옥을 기획했고, 탈옥을 주도적으로 실천했으며, 탈옥을 한 목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가정집 인질사건은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함께 모의했던 강영일씨는 가정집 인질 사건 중 유일한 생존자다.
김씨는 “당시 전과 3범으로 난 무기수였고, 강영일은 15년형을 받아 미래에 희망이 없었다”며 “그 상황에서 5공 시절 새마을운동중앙회 총재로 있던 전경환이 수십억원의 공금 횡령과 탈세 혐의로 구속되고도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이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은 탈옥을 모의하게 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낀 박탈감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당시 지강헌씨의 형기는 17년이었다.
D데이는 1988년 10월8일. 법무부 호송차 한 대가 재소자 이감을 위해 서울 영등포교도소를 떠나 충남 공주교도소로 향했다. 호송차에는 그들이 타고 있었다. 김씨는 호송차의 맨 앞에 앉아 있었다. 김씨는 호송차 안에서 교도관들과 몸싸움을 벌여 총기를 뺏는 역할을 맡았다.
김씨가 맨 앞 교도관의 얼굴을 때리고 총을 빼앗는 것을 신호로 포승줄을 미리 풀어 놓았던 나머지 탈옥 모의자들이 교도관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몸싸움으로 교도관의 이가 부서졌고 얼굴엔 유혈이 낭자했다. 지강헌이 가졌던 권총과 5발의 총알은 교도관들에게서 뺏은 것이다”고 밝혔다. 실제 그는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여의도에 있는 방송사 중 한 곳을 점검해 우리 의사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우리는 재판에 있어서 잘해봐야 국선 변호인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데, 있는 사람들은 수억, 수백억원을 해 먹어도 법망을 잘도 빠져 나간다는 것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호송차 탈취 후 이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서로 뿔뿔히 흩어졌다. 모이기로 한 성북구 드림랜드가 경찰에 포착돼 무리는 다시 합류할 수 없었다. 이후 김씨를 비롯한 8명의 탈주범들은 서울 곳곳에서 검거됐다. 김씨는 “지씨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한 것은 당시 우리의 의견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남동 지하 주점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위스키 ‘썸싱스페셜’을 두 병을 먹고 잡혔다”고 했다.
''대담한 처녀'' 고선숙이 남긴 마지막 수기
1988년 10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후 아직 그 감흥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충남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 차량을 탈취해 도주한 것.
이들은 8박 9일 동안 서울 시내 가정집 5군데를 돌아다니며 당시 ''신문기사 1면''을 장식했다. 이 사건은 17년이나 지난 지금 ''홀리데이'' 영화를 통해 재구성됐다.
영화 ''홀리데이''에서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처녀역의 실제 주인공은 고선숙(당시 22세)씨다. 당시 탈주범 지강헌뿐만 아니라, ''대담한 처녀'' 고선숙씨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22살 여성이 보여준 침착한 태도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6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에 탈출을 감행하였고 동생과 어머니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고선숙씨는 끝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그는 1988년 10월 15일을 ''피의 휴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충격과 혼란의 16시간, 그들은 인간적이었다>라는 제목의 글은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날의 기억''이다. 당시 여성지 <마드모아젤> 에 수록된 이 글은 총 5페이지에 걸쳐 수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사건직후 병원치료 중이던 고씨를 기자가 만나서 인터뷰하고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피로 범벅된 처절한 휴일''
수기는 ''부탁''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제발 나나 우리 가족이 말하는 대로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다. 그는 "보도내용이 전체적으로 너무 과장돼 있고,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10월 16일 "낮 12시 20분경에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는 경찰관들에게 업히다시피 이끌려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안정을 되찾고 ''피로 뒤범벅된 처절한 휴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피의 휴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끈질긴 취재진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정중한 4인의 탈주범''에 대해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남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칼과 권총도 어디로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눈치였고 엄마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자수시키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글을 썼던 당시에도 "엄마는 지금도 ''내가 젊은 아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수 시키지 못한 걸 후회하며 울먹이신다"고 쓰여 있다.
인질극 집영화와 흡사한 부분 상당히 많아…일부 각색된 내용도
당시 고선숙씨가 쓴 글을 보면, 영화 ''홀리데이''가 묘사하는 장면 중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탈주범들은 "자신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나쁜 돈이 아니니 너희들 필요한 것 사서 써라''고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고씨는 탈주범들이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하면서, "내 동생들은 왜 그들을 ''영일이 오빠'', ''의철이 오빠'', ''광술이 오빠'' 혹은 ''강헌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까"라고 했다.
또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테니 조금만 참아라''는 이야기를 몇 번씩 되뇌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일부 각색된 부분이 보인다. 고선숙씨의 글에 따르면, 15일 밤 집안에는 아버지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음 날 새벽에 몰래 집안을 빠져나가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 ''홀리데이''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기에 의하면, "(지강헌은) 피 묻은 담배를 입에 문채 경찰로부터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LP판을 통해 ''홀리데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또 탈주범 중 한 사람인 강영일(당시 21세)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담을 넘어 들어온 동생에게 "나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너는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 형이 원망스럽지? 난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한의철(당시 20세)은 그 날 찾아온 애인에게 "나는 자살할 것이니까 너는 다른 마음먹지 말고 잘 살아. 나를 빨리 잊어버려"라고 쫓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생략되었다.
이 날 인질극의 마지막 장면을 고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지강헌)가 방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목에 대고 유리를 긋자 선혈이 솟았다. 이때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총을 발사했다. 고개를 숙이던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그의 복부에 가서 박혔다"고.
고씨는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살고 있다.
노컷뉴스 배주현/성화선 인턴기자
오유야! 아프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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