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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내가 페미니즘의 신봉자는 아니고,
그렇다고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나누면서까지 나의 어떤 뿌리
그 이면에 묻은 유전자의 근본을 따지고싶은 사람도 아니다만, 나는 외할머니는
외할머니, 친할머니는 친할머니로 부른다.
그것은 나의 세대에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호칭이다.
그런데 지금 일부 누구에게는 '할머니면 할머니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왜 나누느냐' 하지만,
나에게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절실하다.
왜냐하면, 당신들께서는 나에게 잊지못할 추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친할머니는 신의주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나셨다.
그래서 어렸을때부터 한글과 산수는 물론 알파벳까지 배우셨는데 그것들을 모두 습득하고
익히고 또 꽃피우는데까지, 전쟁은 친할머니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큰아버지 손 붙잡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할아버지와 생이별을 하신 뒤에 전라도 광주까지 내려와 지금의 우리 할아버지와
한식구가 되었다.
할머니는 참으로 계산에 밝았고 눈이 영롱하셨다. 그래서 어린 나와 친척동생들을 불러모아놓고
"과자를 먹으면 머리가 나빠져 밥을 먹고 책을 읽어야 해" 하다가도 "과자먹고 싶어요" "만화책 볼래요"
하면 "어찌 그리 말귀를 못알아듣니" 하며 역정을 내시곤 했다.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매맞고 혼날때 할머니가 만류하며 아버지에게 역정내고 "너는 어찌 그러니" 하며 감싸안아주시고
그러면서도 뒤로 가면 나에게 "우리 노동자 그래도 아바이 말씀은 잘 들어야 훌륭한 사람 된단다"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 사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으허허 웃으시던 우리 할머니.
199x년 어느 해에 할머니는 토요명화 하는 날이면 "저깟 영화 무슨 도움이니 빨리 잠이나 자라" 했지만은 눈을 빛내며
기어코 영화를 보겠다는 나와 친척동생들에게 "그러면 빨리 보고 잠자라" 하시곤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티몬과 품바 만화동산 보느라 티비에 빠져있는 우리들의 뒤통수에 대고 그 힘없는 발길 재촉하며
억지로 아침밥 먹이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201x년 어느날 전등을 갈려고 의자위에 올라가셨다가, 우당탕 떨어진 이후로 요양원에 그 빛나는 눈만 성성하게
남으신 채 골절이 끝내 회복되지 못하시고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집에가자. 집에가자." 하고 남은 생 오년을 넘게 보내셨다.
나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한 것이 기억난다. 요양원 옥상에 올라 "할머니. 여기 좋아요. 근데 할머니 집에 그 이끼랑
먼지구댕이 할머니가 다 닦아야 하니까 빨리 나아요." 하며 휠체어를 밀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 이듬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누워 "내가 여기서 자야 한다. 할머니가 추우시단다" 했을때 "아니 썅, 그딴말좀 하지마요.
따뜻한데서 좀 자요. 아버지는 왜 왜. 왜." 하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할머니 장례식.
그토록 지랄맞게 슬펐던 장례식.
그다음 우리 외할머니.
입이 걸고 담배 많이 피웠던 우리 외할머니.
우리 외할머니는 외할머니 포지션과는 거리가 진짜 멀었다.
우리가 와도 담배 입에 물고 "너네 밥은 먹었냐" 하며 피우던 담배 끄고 아궁이에 가서는 냉장고 안에 물김치며
언제 사놨는지 눈치도 못챈 소고기랑. 그래도 계란은 안해주셨다. 우리 외할머니가 그랬다. 계란후라이는 없어보이니까
소고기 먹으라고. 그래놓고 본인은 이놈저놈 하면서도 힘없는 팔 늘어놓으시면서도 밥 더먹어라 그만먹고싶으면 그만먹어라.
근데 더먹고싶으면 더먹어라.
우리 외할머니는 내가 군대간 날부터 계속 울었다고 했다.
우리 손자 군대가서 얼마나 힘들었니. 밤잠도 못자고 매일 울었다고 했다.
내가 병장달고 휴가나온날 외할머니 앞에서 경례를 하는데 외할머니는 오열을 하며 "저놈 늠름해진다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며
울다말고 내 앞에 고봉밥 위에 LA갈비를 배가 터질때까지 올려주셨다.
외삼촌이 말하길, 내가 말년휴가 복귀하던날 우리 할머니는 그 먼 초승달을 바라보며 그렇게 우셨다고 했다.
그게... ㅋㅋ 웃긴 이야기지만, 외삼촌은 방위였다. 그리고 외가쪽에는 딸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대 힘든거, 그게 그렇게 더 조바심나고 힘드셨던 모양이다.
외할머니는 평택의 이모부 배농장에 김을매러 나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머리를 찧고는 일년을 넘게 시름시름 앓았다.
그리고 200X년 어느날 내가 전역하고 얼마 안된 그 해의 설날 마지막날에 다들 오너라 다들 오너라 하고서는 안양의 한 병원에서
눈을 뜬 채 내가 온 것을 눈짓으로 확인하고는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우리 가족에게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분명 이야기하면 외할머니든 친할머니든 눈물바다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다음날이 되면
숫제 그 근본없는 이기적인 마음들로 다시 돌아올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야기들을 굳이 꺼내놓지 않는건
비단 남은 친족의 이기적인 마음때문만은 아니다.
가슴속 남은 추억의 단편은 나와 우리 부모님의 마음과 같지 않기에 굳이 동기화시키고 싶지않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나 혼자 쭈그려 앉아있을 뿐이다. 들춰내어 아름다운 추억들은 분명히
어른들의 사정과 충돌해 더러운 이야기들로 내 추억 한켠이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친할머니, 우리 할머니. 뵐 수 있다면 가능한한 대조동 라이온스 공원에서 손을잡고 장난감을 사줘요.
외할머니. 가능한한 다시 뵐 수 있다면 공덕동 굴다리 아래 문방구 지나는 길에 있던 그곳에서 아는척을 해줘요.
둘 다 이제는 없는 길이겠지만 무심한듯 그러나 손내밀던 당신들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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