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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치첸이차의 마야 피라미드 아메리카대륙은 여러가지로 구대륙과 비교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대륙(?)에는 토마토와 옥수수, 감자와 담배(!)와 같은 이전의 유라시아인들이 듣도보도 못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들 또한 유라시아대륙의 사람들이 보기엔 경악하고 놀라울만한 독특한 풍습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몽골로이드계의 수렵민들이 BC 20000~15000년경에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서 BC 10000년경까지 아메리카 대륙 구석구석에 정착했으며 자생적으로 농경을 발전시켜왔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경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안데스산맥의 경우 BC 3000년경에, 메소아메리카에서는 BC 4500년경에는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에 농경민들이 경작할 수 있었던 식물은 오늘날 '돼지옥수수'라고 불리는 이삭이 채 5cm도 안되는 아주 작은 옥수수와 땅콩, 감자정도 였으며 이들은 이러한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이러한 작물들을 크게 교배해가면서 16세기 유럽인이 아메리카대륙에 상륙했을당시 이미 이삭의 길이를 15~17cm까지 키워놓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농경의 발달은 구대륙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인 전제정권과 국가의 탄생을 야기시킵니다. 위의 유물은 BC 3세기경에 만들어진 옥으로 만든 마스크, 메소아메리카 최초의 문화라 할 수 있는 올메까 문화(La cultura de olmeca)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올메까 문화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후에 이르기까지 메소아메리카에서 번성했습니다.
이 문화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자료와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사회제도와 역사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이 문화가 고전기 마야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준것은 확실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비슷한 시대에 멕시코 고원에서는 떼오띠와깐 문화(La cultura de Teotihuacan)가 번성하고 있었는데, 이 두 문화는 옥수수경작을 주 산업으로한 농경문화권이었으며 떼오띠와깐 문화의 중심지에 남아있는 달과 태양의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남아있습니다.
높이가 50m에 달하는 떼오띠와깐의 달의 피라미드(왼쪽)와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내려다본 도시 광장의 모습 마야(Maya)족은 32개에 달하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의 도시연합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야족은 과테말라와 유카탄반도의 정글지대에서 욱스말(Uxmal), 치첸이차(Chichen Itza), 빨렝께(Palenque), 보남팍(Bonampak), 띠깔(Tikal)과 같은 여러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언어와 부족은 다르지만 모두 마야문명(La civilizacion maya)으로 분류됩니다.
마야의 도시들은 학자들이 흔히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 중심지와 근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에는 피라미드 신전과 궁전, 관청들이 건설되어 있었으며, 광장에서는 상업적인 교역이 이루어졌고 (고전기 마야문명의 중심지였던 띠깔의 경우 근처에서 불을 일으키거나 화살촉을 만드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부싯돌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상업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마야족 상인들은 때때로 마야 도시들을 넘어 멕시코고원과 카리브해의 섬지역과도 교역을 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너머에는 평민들이 거주하는 구역이 존재했습니다. 마야족은 각 도시를 다스리는 왕과 신관들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계급체계를 이루었는데, 각각의 도시들은 고대 그리스에서와 같이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었으며, 자주 전쟁을 벌였습니다.
고전기 띠깔의 복원도(위)와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의 모습(아래). 이 도시의 유적들은 대부분 정글에 묻혀버렸다. 보남팍에서 발견된 전투장면을 묘사한 벽화(위)와 보남팍의 왕 '차안 무안'(Chaan Muan)이 제물로 바칠 적을 사로잡고있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아래) 보남팍의 벽화와 기타 마야도시들의 유적에서 묘사된 마야 전사들은 모두가 재규어 가죽과 께찰의 깃털로 만든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고, 문신을 해서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전장에 등장합니다. 마야인들은 전사를 '명예로운 직업'으로 간주했으며, 이들은 거의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의 무기로는 찌르고 휘두를 수 있는 창과 그보다 작은 투창, 그리고 곤봉류가 있었습니다.
활로 무장한 궁수들도 간혹 보이는데 활은 적에게 타격을 주기보다는 부상을 입혀 사로잡기 쉽게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야인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이러한 행위는 '포로학대'이며 '비인간적인 끔찍한 만행'이겠지만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시달렸던 고대시대에는 포로를 노예로 부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데 입이 더 늘면 식량문제가 더 심해질것이 뻔하므로) 그렇다고 이들을 풀어줄경우 또 쳐들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포로를 죽이는 방법을 채택했던 것입니다.
특히나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것은 주변 부족들의 싸움가능한 남자의 수를 줄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공포심을 유발하는 심리적인 요인도 존재했습니다.
마야문자가 가득 적혀있는 후기 고전기의 마야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