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외교’에 초점을 맞춘 해외순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인들이 대거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도를 거쳐 현재 베트남을 방문 중이고 지난달에는 러시아 방문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방문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이른바 ‘4대 그룹’ 총수가 모두 수행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현지에서 “바깥에 나와 보니 기업이 곧 나라더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기업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반가워하더군요. 그런데 이러한 대통령의 인식이 정부 전체로까지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더 두고 보아야겠습니다.
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이틀째인 지난달 21일 있었던 일입니다. 크렘린에서 만찬이 열렸습니다. 대기업 총수들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크렘린측이 경호상의 이유로 우리 참석자들은 단체로 크렘린에 입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룹 회장들과 경제단체장들은 정부측 수생원들이 묶고 있는 모스크바 시내 프레지던트 호텔로 모였습니다. 대통령 수행원들과 함께 우리정부가 마련한 차량을 타고 크렘린으로 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제인들은 다른 호텔에 나뉘어져 묶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인들을 기다린 것은 흔히 ‘봉고차’라고 부르는 12인승 소형 승합차(쌍용의 이스타나)였습니다. 장관과 국회의원 등 다른 고위인사들이 탄 승용차와 대형버스를 따라 ‘봉고차’는 행렬의 맨 끝에서 크렘린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경제계의 거물들이 ‘봉고차’ 한 대에 한꺼번에 실려 가는 장면을 지켜본 각 기업의 임직원들은 할말을 잃었다고 한다. 크렘린 측이 한국대기업총수들을 봉고차에 태워 오라고 주문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정부가 유연성을 발휘해서 봉고가 아닌 미니버스정도로 올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지금까지 기자가 취재한 바로는 크렘린 측으로부터 차종 선정(봉고차 등)에 대한 주문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그룹 회장들이 ‘봉고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본 현장의 대기업 임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분을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암 수술을 받은 대기업 회장도 있었고 비좁은 ‘봉고차’에 오른 경제인 대부분이 대통령보다 더 고령이었습니다. 고위관리와 정치인들이 탄 승용차와 대형버스를 그룹 회장들이 ‘봉고차’를 타고 뒤따라 가게 한 것은 ‘정치가 경제의 상위 개념’이라는 한국적 현실을 인정한다 해도 좀 심한 처사였다는 생각입니다.
한 대기업의 모스크바 지사장의 말입니다. “우리 회장님이 뭐 그렇게 ‘대단한 분’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가슴이 메어지는 것은 기업인도 정치인이나 공무원 못잖게 국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소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기업인은 별수 없이 고위 관료나 국회의원의 장식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했습니다.”
다른 주재원의 푸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밖에서 글로벌 기업이라고 찬사를 받으면 뭐하나, 안에서는 이 정도 대접을 받는데…”
어느 대기업 총수는 전용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왔습니다. 전용기에서 갑자기 ‘봉고차’로 갈아탄 것이죠. 사실 일분 일초가 아쉬운 대기업 총수들이 ‘날아갈 듯 즐거운 마음’으로 러시아에 따라온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해외 투자설명회(IR)일정까지 포기하고 모스크바로 온 총수도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SK의 고 최종현 전 회장이 자신이 벤츠 승용차를 타는 이유를 설명했다는 대목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차라서가 아니라 가장 안전한 차라서 타고 다닙니다.” 최고경영자의 안전은 기업의 운명 나아가 국가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4대 그룹 총수가 탄 봉고차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날로 우리나라 주가는 ‘반 토막’이 날 겁니다.
기업의 가치는 최고경영자가 결정합니다. 빌 게이츠 없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상상할 수 없고 박태준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포스코는 없었을 겁니다. 기업과 기업인을 홀대하면서 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까요? “바깥에 나와 보니 기업이 곧 나라더라”라는 말은 기업과 기업인을 아끼고 대접하겠다는 얘기 아니었나요?
어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