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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코끼리
꼬리가 석 자나 되는 이상한 짐승
소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일연의『삼국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통일 신라 소성왕 때인 799년의 기록이다. 이 표현대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영락없이 코끼리가 그려질 것이다. 신라는 국제 무역이 활발한 나라로 당과 일본은 물론이고 이슬람과도 교류했다. 짤막한 대목이지만, 그 활발한 무역의 와중에 어느 코끼리 한 마리가 신라 땅에 발을 디뎠던 것은 아닐까? 신라 사람들은 이 기이한 동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측은 무성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象(코끼리 상)’이라는 한자로만 그 존재가 막연히 알려졌던 기이한 동물 코끼리. 이 코끼리가 우리 역사에 ‘확실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 후로도 수백 년이 흐른, 조선에 들어와서이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 5두씩을 소비하였다. (태종 11년 2월 22일)
신비롭고 기이한 동물 코끼리는 태종 11년에 느닷없이 조선 땅에 등장한다. 라오스나 태국이 아니라, 옆 나라 일본을 통해서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위와 같이 1411년 2월 22일 일본이 조선에 코끼리를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일본 국왕 원의지는 천황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아시카가 막부의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 코끼리를 어디서 구했을까? 1408년 6월 22일 남만, 즉 오늘날 동남아 지역의 선박이 말 한 마리, 공작과 앵무새 각각 두 쌍 그리고 코끼리 한 마리를 싣고 일본 와카사 지방에 도착했다. 이 동물들은 쇼군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외교 선물로 받은 코끼리를 다시 외교 선물로 조선에 보낸 셈이다.
이 코끼리는 궁중의 가마, 말, 목장 등을 관리하는 ‘사복시’에 맡겨졌다. 사복시는 몇 해 전 역시 일본이 선물한 원숭이를 잘 길러 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말이나 원숭이와는 급이 다른 동물이었다. 실록에 먹이양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코끼리의 먹성은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4, 5말(두)이라면 70~90리터 정도의 양. 사람도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던 그 시절에 날이면 날마다 그만큼의 콩을, 그것도 단 한 마리의 동물이 먹어 치우니 사복시에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마의' Copyright(c) MBC&iMBC All rights reserved.
▲ 현재 방영되고 있는 MBC 드라마 「마의」의 한 장면. 주인공 광현(조승우)이 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사복시이다. 광현은 지금으로 치면 수의사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듬해인 1412년 코끼리는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정삼품 벼슬을 지낸 적이 있는 이우라는 양반이 코끼리를 보겠다며 사복시를 찾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우는 코끼리의 모습이 추하다며 비웃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코끼리는 그만 이우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비록 이우가 코끼리를 비웃었다고 해도 코끼리가 사람 말을 알아듣고 성을 냈을 리는 없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아마도 이 코끼리는 수컷이었고 마침 이때 발정기였던 것 같다. 수컷의 양쪽 눈 옆에 있는 측두샘이 부풀어 오르며 끈적끈적한 검은 물질을 분비하면 발정기라는 표시다. 발정기는 1년에 한 번 두세 달 정도 지속된다. 코끼리는 초식 동물이라 기본적으로 온순한 성질이지만 발정기를 맞은 수컷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흥분 상태가 된다. 코뿔소 같은 큰 동물까지 공격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민감한 시기에 이우가 코끼리를 자극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기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사건의 파장이 꽤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외교 선물이라는 귀한 신분이니 어찌어찌 넘어갔으련만 코끼리는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사람을 죽이는 사고를 쳤다. 이 희생자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름 없는 평민이나 노비쯤으로 짐작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이 태종에게 청한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 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1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에 두소서.”
『맹자』에 따르면 주나라의 정치인 주공이 호랑이, 표범, 코뿔소, 코끼리를 멀리 쫓아내자 천하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유정현의 말에 태종은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코끼리를 둘러싼 이 모든 소동이 한 편의 희극처럼 느껴진 것일까?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한양에서 쫓겨나 전라도로 내려간 지 약 반 년 만에 코끼리는 다시 실록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를 올렸다.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장도는 오늘날 보성군 벌교읍에서 배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어 오늘날 꼬막과 낙지가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 되어 주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 내륙의 열대우림이 고향인 코끼리에게 수초는 영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코끼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태종은 코끼리를 육지에 내보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했다. 코끼리를 둘러싼 난리법석은 한동안 가라앉은 듯하다가 세종 2년인 1420년 전라도 관찰사가 청을 올리면서 다시 불거졌다.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한마디로 전라도만 애먹는 것이 억울하니 옆 동네들과 고생을 나누게 해 달라는 말이었다. 세종이 곤룡포를 입고 앉아 있긴 해도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정정한 상왕 태종이 가지고 있던 때였다. 전라도 관찰사의 청을 허락한 사람도 세종이 아닌 태종이었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하소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끼리가 또 사람을 죽인 것이다.
“공주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육지로 돌아와 그나마 좀 살 만해졌는데 다시 섬으로 가라니 코끼리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 눈에 코끼리는 곡식을 축내는 것도 모자라 자꾸만 인명 피해까지 일으키는 골칫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세종은 이 기이한 동물에 애착이 있었던 것일까? 충청도 관찰사의 청을 들어주면서도 코끼리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세종의 당부를 끝으로 기록에 코끼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과도한 먹성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낯선 나라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귀양’만 다니던 코끼리는 세종의 당부대로 무사히 제 수명을 다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는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어디에도 코끼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니, 세종의 당부대로 적당한 섬에서 탈 없이 지내다 생을 마쳤다고 상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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