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어떤지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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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필요 없는 결론
신혼부부가 있다. 결혼한 지 1년이 안되어 2세가 생겼다. 전 집안이 경사가 났다. 7대 독자 집안에 2세가 생겼으니 오죽하랴. 그런데 그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물론 글마저 읽는 것이다. 자연스레 2세는 집안의 자랑이 되어버린다. 호들갑을 떨기에 족하다. 당연히 신혼 댁은 축하받기 바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먼 친척 하나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2세는 결혼 한지 10개월도 안돼서 태어났으니 문제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며칠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혼전순결’이라는 ‘윤리’를 거론하며 신혼 댁을 ‘부정한 여자’로 몰아버린다. 신혼 댁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뭐라고 말 한마디 못하고, 남편이 나서서 ‘요즘은 .......’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그래도 ‘윤리’는 지켜야 한단다. 그래서 원래 이상한 양반이니 사과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 먼 친척의 진실에 대한 규명작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세는 너무 똑똑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의 문턱에도 간본 적 없는 우리 집안에서 이렇게 똑똑한 이가 나올 리 없다’고 주장하며, 친자가 아닐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강하게 주장한다. 처음엔 모두 미친 놈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 마음은 개운치 않다.
말이 안 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선동을 이렇게 했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한 가지 사안을 집요하게 주장하면, 나중에 그것은 의혹이 되고, 때로 그것은 진리로 변하기도 한다. 지금 이 시점에 여론조사를 해보자. 김대중 전대통령이 빨갱인지 아닌지 말이다. 아마 빨갱이라고 믿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의혹은 이래서 좋다. 또 선동은 이래서 무섭다.
무의미한 친자확인 소송
이 이상한 친척은 지칠 줄 모르고 한발 더 나가 친자 확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세의 엄마 아빠는 펄쩍 뛰지만 친척은 ‘아주 간단한 검사’로 확인 될 수 있다며 검증하자고 주장한다. 남편은 화를 내며 더 이상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주장은 멈추지 않는다.
주변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어 간다. 사람들은 ‘당연히 친자’라는 믿음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그 2세를 보는 눈도 바뀐다. 이제 그들은 은연중에 ‘다름’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숨기는 게 없다면 해도 되지 뭐’라고 웅성거린다. 어느 덧 ‘이상한 주장’에서 ‘숨기는 게 없으면 검증하자’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선동의 무서움이다.
엄마는 극력 반대한다. 어찌 그것이 단순한 ‘검증’이나 ‘검사’겠는가! 친정 집안도 난리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왜 검사를 해야 하냐고 말이다. 그러나 점차 ‘숨기는 게 있으니 검사를 못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다. 억울해 죽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주변 분위기는 더해간다.
남편의 태도는 반대에서 엉거주춤해진다. 이제 남편이 권한다. 결백을 밝히자는 식이다. 그러나 아내는 안다. 남편도 마음 저편에 의심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결국 주변 등쌀에 아내는 항복을 하고, 검사를 받기로 한다.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검사가 어떻게 나오든, 그 가정은 더 이상 예전의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그 가정이 유지되기도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신뢰’가 깨진 부부 그것은 남남보다 못하다. 여기서 진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만신창이가 된 진실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모두 친자확인을 통해 진실을 밝히면 우리사회는 아름다워질까?
논쟁은 이미 논쟁이 아니다
황우석을 둘러싼 논쟁이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실질적인 논쟁보다 이런 저런 언론 플레이만 난무하는 형국이다. 애시당초 이렇게 커질래야 커질 수 없는 문제였는데, 이렇게 되었다. 언제 우리나라 국민이 생명공학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이젠 월드컵 축구보다 더 관심을 가진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관심은 허상이다. 그들은 생명공학이나 진위여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중계방송’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외국까지 가세한 ‘카더라~’의 연속보도가 마치 경마보도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언론과 여론은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지금 서울대가 검증위를 구성해서 검증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미 그 검증 결과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진실 혹은 거짓으로 나오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적게는 황우석팀이, 또 우리나라 생명공학계가 좀 더 크게 우리사회가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 아닌 ‘정쟁’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이 논쟁은 서울대의 조사가 끝나기 전에 결말이 나올지 모른다. 신중히, 그리고 조용히 조사하는 동안 그렇게 외부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시간이 걸리는 동안 다른 연구결과가 이 논쟁을 종식 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이 황우석팀이든 아니든 말이다. 그러면 아무도 이 진실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과연 2005년 몇 달 동안 우리사회는 과연 무엇을 한 걸까?
줄기세포가 진짜더라고 밝혀지더라도, 우린 이미 모두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 진위여부를 떠나 ‘여하튼 대한민국 생명공학계는 문제 많다.’ 혹은 ‘한국과학은 문제 많다.’ ‘한국은 문제 있다’는 식의 어설픈 이미지는 외국인의 머리에 아주 깊이 인상지울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갈등에 대한 치유를 뒤로 하고라도 말이다. 가짜로 밝혀진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찔한 언론보도
요즘 TV에서는 DMB를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다. 똑똑한 네비게이션에서 이젠 DMB도 볼 수 있다고 뉴스 시간에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홍보를 할 정도다. 물론 DMB는 중요한 변화고 기술의 발전이다. 그래서 홍보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보도는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운전을 하면서 DMB를 보는 듯한 모습을 그것도 뉴스 시간에 버젓이 방영하는 모습이다. 운전 중 핸드폰도 걸지 말자고 하는데, 신경뿐 아니라 시선마저 빼앗겨 버리는 DMB 화면을 보는 운전은 음주운전보다 최소한 몇 십 배 위험한 짓이다. 그런데도 뉴스시간에 그런 화면이 나온다.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운전 중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이 음주운전보다 위험하다고 하는데 말이다.
도무지 언론은 이런 신기술의 발전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던져진 모든 기술과 성과는 양면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앞으로 DMB폰이 나오면 우리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 변화는 어쩌면 황우석팀의 연구결과보다 우리사회에 큰 영향을 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런 고민은 없다.
생각해보라. 2-3년 뒤 전철에 탄 모든 사람이 DMB만 보고 있는 풍경을 말이다. 그것은 대화의 단절을 의미하며, 사색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로인해 우리사회는 또 하나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마치 인터넷의 등장으로 우리사회가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듯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고민이 없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똑똑한 네비게이션’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네비게이션 DMB 장착 금지법’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운전석 앞자리에는 DMB 설치를 법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운전 실력을 확신하는 수많은 살인마들이 거리를 활보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언론은 이런 고민이 없다. 이런 아찔한 장단에 우리가 춤을 췄는지도 모른다.
사라져버린 화두
이미 화두는 사라진지 오래다. PD수첩은 아주 소중하고 조심히 다루어야 할 화두를 정쟁으로 만들어버렸다. PD수첩이 그렇게 절규하며 던졌다고 주장하던 ‘난자제공’이나 ‘과학윤리’에 대한 진지한 논쟁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이 사회를 휩쓸고 있는 것은 그런 고민이 아니라 오로지 승부의 결과에 대한 흥미뿐이다.
때로 진실은 진실보다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적 행동’이다. 정치적이라고 하면 나쁜 이미지가 우리나라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만, 때로는 그런 정치적인 행동이 더 큰 화를 막아주기도 한다.
진실은 진실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지금 같은 과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처만 난무한 진실은 때로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시간이며, 여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선인의 말이 이 뜻이리라.
시간만 주어졌다면 황우석팀의 성과는 저절로 세상에 노출되게 되어 있었다. 지금 그렇게 많이 쌓인 전라도 지방의 눈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물론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당장 움직이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황우석팀의 연구 성과가 그런 성질의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이렇게 언론에서 중계 방송하는 상황에서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 PD수첩이 아닌 100분 토론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였다. (필자는 100분 토론도 반대다. 100분 토론도 대화는 없고 주장만 난무하기 때문이며, 선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문제도 진실문제도 말이다. 진득한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분위기에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윤리’이며, ‘진리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코 힘싸움, 기싸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그 꼴이 되어버렸다.
황우석 신드롬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
황우석 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이건 뭔지. 어이가 없다. 남들은 그의 연구 결과에 목숨을 걸다시피 싸우고 있는데, 이런 말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인 것이다. 바로 황우석이, 그 팀이 미국 혹은 외국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이미 학자(과학자)가 아닌 행정가나 정치가가 되어버린 섀튼이 요구한 것이 이건지도 모른다. ‘형제 미국으로 오라’, ‘다 데리고 오라’ 이래서 문제가 된 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이런 상상에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윗 글에서 친자 확인 소송을 겪어야 했던 ‘천재 아이’를 보았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집안의 자랑일 것이다. 사실 그 아이가 커서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그 아이는 집안의 자랑이 된다. 한 동안은 말이다. 그런 자랑이 뭘 바라고 하는 것이겠는가.
필자는 황우석 신드롬도 이런 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연구가 몇 조 원의 국익을 가져다주고 이런 ‘계산에 의한 인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외국에서도 인정받으니 좋다. 정확히 이 정도 수준이라고 본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박주영 신드롬을 생각해보자. 올해 축구는 박주영으로 시작해 박주영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냉철히 말해 박주영이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은 ‘아시아에서나 통하는 실력’이다. 우린 알고 있다. 펠레, 마라도나, 지금 영국의 루니 등등 세계의 천재급 선수들은 10대에 이미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청소년 대회급이 아니라 말이다. 박주영은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도 힘을 별로 못썼는데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실력이 아니라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 희망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죽여야 했던 것인지 의문스럽다.
미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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