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이 논쟁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다툼과 학문적 견해 대립이 예송이라는 학문적 논쟁으로 표출되었다는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손들이 보기엔 찌질파이트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들에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논점이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속은 완전히 정치 문제인 가짜 싸움이 아니었다. 이때 사대부들한테는 중요한 문제였다. 유교적 도리를 국가 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던 조선에서 예(禮)가 가지고 있는 중대함이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지니는 가치와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바른 적용방식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았다고 보면 된다.
유사한 예로 중세 서양 신학자들도 별 찌질한 이유로 수많은 아가리 파이트를 벌이는데, 이는 기독교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온 결과로, 이런 논쟁이 조선에만 있었던 잉여파이트가 아니라 이념과 정치가 미분화된 중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논점으로 다가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걔네들은 진심으로 했다.
일각에서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악질적 당파싸움의 극치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정작 예송논쟁 과정을 보면
이 논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골수 송시열 추종자들로부터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함했으니 반좌의 율을 적용하라고 간접적으로 죽음을 주장한 일도 있긴 했으나 소수에 불과했고 당시의 군주 현종이 적절히 싸움을 완화시키면서 숙종 때의 피바다와는 비교도 안되는 온건하고 점잖은 분위기였다. 현종이나 신하들이나 재위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병자호란의 여파와 당시 이상 기후로 인한 연이은 기근(경술, 신해년의
경신대기근) 때문에 피폐해진 민생을 수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때문에 붕당정치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진 시기를 인조반정부터 숙종 시기
경신환국 이전까지로 산정하는데, 실제 전쟁기간을 제외하면 예송논쟁 시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붕당정치의 모습이 지켜지던 시기였다. 뒤의 영조조, 정조조에서 상대 당파 새끼들과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서 못 삽니다! 라고 악을 써대던 모습에 비하면 여기선 상대 당파의 말이 합리적이면 오히려 편들어주는 일도 허다했다. 대표적인 것이 송시열의 친구 권시 등이 윤선도를 옹호한 일 등이고 이시백, 정태화, 원두표 등 한당도 계속 중재를 시도했다.
간혹 예송논쟁의 관련자들인 송시열이나 윤휴 같은 이들이 당쟁 때문에 희생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들이 죽은 원인은 후대인 숙종의 환국 정치 탓이지 예송논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무엇보다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서인과 남인의 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며, 이것이
실용 정치에 반영된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 노비제에 대한 논쟁, 호적의 재점검, 예학의 보급, 폐4군의 재개발 논의 등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가 현종 ~ 숙종 시기임을 파악하면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당론이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적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16세기 이래 조세 제도의 방만, 양난과 소빙하기로 인해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를 재건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대부마다 의론이 달랐지만, 대표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의견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서인 : 김육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동법이 보급된 이후 이전까지 반대하던 송시열이 찬성론으로 선회하면서, 대동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노비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노비종모법 등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해체하려 하였다. 한편 후에 소론 계통이 되는 남구만 등은 폐4군의 개발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서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자영농을 직접적으로 육성하여 국가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비제의 해체와 민생의 안정을 위한 보조 조치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서인 측에서 대대적으로 주장한 것이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든 노비든 성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인간'임을 주장한 이기일원론이었다.
- 남인 :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한편 재야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에서는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남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국가적인 힘을 통해 위계 질서를 바로잡고, 이를 통해 각각에게 맞는 역할을 배당하는 사회였으며, 이 때문에 신분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폐쇄적인 한편 왕권의 확립을 주도하였다. 이를 위해 남인이 내세운 것이 절대성인 이(理)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코자 한 이기이원론이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서인의 국가적 목표와 남인의 국가적 목표는 조선에 혼합적으로 반영된다. 서인에 의한 신분제 해체와 자영농 육성의 담론이 18세기 노비제가 대대적으로 해체되고 안정된 중소 농민의 가정이 확립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편, 남인의 담론을 통해 안정된 왕권이 확립되는 한편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17세기의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18세기 서민층의 성장과 탕평정치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중국과 일본을 바라보면서 '왜 우리는 저렇게 못했냐'는 질타가 있는데, 17세기 두 국가를 지탱한 것이 안정적인 농민층의 형성과 농산물 생산의 증대, 그리고 이를 통한 상업 발전임을 상기해보면 17세기 조선의 국정은 이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여러 악재로 인해 타 국가들보다 다소 그 발현이 늦었을 뿐이다.
예송논쟁은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담론을 양자가 재확인한 것이며, 이는 양자가 추구하는 국가관과 개혁안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즉 예송논쟁은 실효성 없는 학문 논쟁이 아니라 정치 철학의 기초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조선의 성숙과 함께 했다. 물론 자연과학 등 근대적인 학문과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과 논쟁 '그 자체'가 백성들의 삶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정치학으로서 의미 없는 당쟁에 불과한 사건이 아님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