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을 앞둔 어느날.
수능이라는 족쇄에 해방된 그때의 겨울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자유에 몸을 던져 미친듯이 놀았다.
아직 교복을 제대로 벗지 못한 어린 소년은 앞 일은 신경조차 쓰지않고 인생 최대의 행복을 만끽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놀음은 한정적이었다.
새 해가 밝고 편의점에서 당당히 신분증을 보여주며 프렌치블랙을 요구할 수 있게됐을 즈음.
돈이 궁해졌다.
그래
돈이 궁했을 뿐이다.
우연히 내 불알친구의 자취방에 노트북 하나 들고 가 기생해가며 밤새도록 게임을 하고있을때였다.
친구의 누나가 친구 자취방을 찾아왔다.
워낙 어릴적부터 알고지냈던 사이었기에 딱히 어색함이 없었고, 나도 밑으로 내려가 반갑게 인사하며 짐을 들어 옮겨주었다.
친구 누나는 '뭐야 집사가 한 명 더있었네.' 라며 나를 반가워했다.
친구 누나는 이비인후과의원의 간호조무사로, 어릴적부터 부모없이 살았던 친구의 뒷바라지를 해준 부모님같은존재였다. 친구하고는 네 살 차이인데,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봐 어린나이에 간호조무사가 되어 지금은 강남의 작은 병원의 실장까지 됐다고한다.
나름 공부잘하던 친구놈은 이름있는 사립대학을 갔고.
260만원의 국가장학금을 제외한 나머지 학비는 누나가 보태줬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됐든 친구 누나는 피자와 치킨, 그리고 맥주를 잔뜩 사들고왔고, 아직 맥주의 쓴맛밖에 모르는 우리는 구겨지는 표정을 눌러가며 맛있다는듯이 피자와 치킨,맥주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친구가 가게 될 대학의 이야기. 내가 가게 될 대학의 이야기. 더 나아가 친구 누나가 근무하는 병원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도중 술기오른 친구가 입을 열었다.
"야 너 블로그인가 그거 잘하잖아 누나, 얘 시켜봐"
무슨 소리인가 이해하지못해 되물었다.
"뭔 블로그?"
취한건지 손으로 과한 제스쳐를 취해가며 뭉개진 발음으로 뭐라뭐라 지껄이는 친구는 뒤로 한 채, 나를 관심있는 듯 바라보는 누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야, 너 블로그관리같은 거 할 줄 알아?"
고등학교 1학년즈음이었을까.
밴드에 빠져 여러가지 베이스 엠프 이팩터 피크 등을 수집했던 그 시기엔 돈이 빠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엔 시간과 나이가 발목을 잡았고
용돈으로 충당하기엔 너무도 큰 금액이었다.
그때 문득 블로그를 팔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바이럴마케팅대행업체
이곳에서는 고품질블로그를 고가에 매입하고있었다.
그렇게 난 초등학생때의 흑역사를 75만원에 팔아 값비싼 베이스를 마련했다.
어릴적 만져봤던 그 금액의 달콤함을 잊지못한 나는 블로그를 새로 만들었다.
블로그를 키우는건 쉬운일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인기글들을 블로그에 그대로 가져와 코멘트만 몇개 남겨놓고 여러블로그를 돌아다니며 서로이웃만 추가하면 됐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고등학생이 만질 수 없는 고액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친구누나는 한가지를 제안했다.
병원에서 마케팅비용으로 200만원을 줬는데 대충 해놓고 먹고 튀었다. 그래서 그냥 마케팅비에 거금 안쓰고 대충 우리가 블로그만들어서 할 생각인데 혹시 너 블로그 잘 만질줄 알면 네가 해볼 생각 없냐? 하는 내용이었다.
11,12월을 미친듯이 놀기도 했고, 앞으로 시작되는 대학생활과 학비를 생각하면 돈이 필요했다.
난 블로그에대한 어느정도의 검색알고리즘을 알고 있었기에 승낙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친구 누나는 내게 실장님이 되었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 간단한 면접을 봤다.
30대 중후반의 어느정도로 젊어보이는 원장님이었고 실장님은 원장님을 "야이 돼지야"라는 별명으로 부르고있었다.
원장님은 흔쾌히 나를 고용하겠다 말씀하셨다.
그때당시 최저시급이 5500원이었는데 시급을7000원 받는 조건으로 하루 4시간씩 병원에 와서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 된다는 근무계약이었다.
그렇게 난 1월달부터 병원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를 전전하고 블로그를 팔아 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마케팅의 소재로 쓸만한 글은 손쉽게 쓰였다.
너무도 쉽게 쓰였다.
원장님은 내게 개인 작업실도 마련해주셨는데 매일 쓰는 마케팅글은 사실상 1시간이면 끝났기에 1시간 대충 마케팅글을 써놓고 나머지 3시간동안은 웹서핑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달이 흘렀다.
내가 관리하던 블로그는 강남24시간병원 강남수액병원 등 꽤 괜찮은 키워드를 선점한 상태였고, 전문 업체에서 관리한 블로그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
마케팅의 성과였는지 수액으로 수익을 올리던 이 병원에선 주말 수액 환자가 대략 200%정도가 늘었다.
원장님은 날 뽑길 잘했다며 껄껄 웃어댔고, 실장님은 '준호새끼는 집에서 게임만하는데 니는 이런재능도 있었구나.' 라고 나를 치켜세워줬다.
나는 멋쩍게 웃어보이며 "준호는 공부 잘하잖아요, 이제 곧 서강대생인데 저보다 훨씬 대단하죠." 라며 말했다. 딱히 겸손을 떤 건 아니었다.
블로그에 글이나 끄적이는건 요령만 있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난 2개월 뒤면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지잡대에 가게되고 내 불알친구는 2개월 뒤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일류대학에 가게 될 테니까.
원래 근로계약서상으로 내가 받을 월급은 75만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을 시작한 이래로 병원의 수액을 맞는 환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었고, 병원매출또한 올라간듯 했다.
원장님은 내게 너무 고맙다며 상여금을 포함하여 내게 140만원이라는 첫 월급을 주셨다.
그날은 회식이 있었다.
실장님과 나, 친구와 원장님이 모여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원장님이 취기에 말씀하셨다
'야 준호야. 너 학비 그거 내가 내준거야. 내가 얘한테 빌려줬어 빨리 갚아야돼.'
웃으며 장난식으로 말하는 어조였다.
그리고는 원장님은 실장님을 가리키며
'내가 얘 원룸 보증금도 빌려줬어'
대학학비까지 선뜻 빌려주다니.
대단하신분이구나 생각했다.
그 생각에서 그쳤어야했다.
나는 병원홍보에 점점 열성을 다해 매일매일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지식인 블로그를 뒤적여가며 일을했다.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천직이었고, 원장님도 나날이 늘어가는 매출로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었다.
어느날은 이런제안을 받아봤다.
'민호야. 내가 앞으로 3년뒤에 종합병원을 차릴거야. 그래서말인데 너 그냥 대학 안가면 안될까? 그냥 대학가지말고 나랑 이 일 같이하자. 나중에 종합병원 차리면 널 마케팅매니저로 해줄게.'
굉장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나름 실력있는 이비인후과전문의가 나를 필요로하고, 내 미래를 책임져주겠다는 제안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두려웠다.
이제 막 미성년자를 벗어난 스무살이었다.
남들이 다 가는 대학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두려움이 많았다.
결국 난 원장님께 재택근무로 대학을 다니면서 일을 이어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대학을 입학할즈음, 원장님은 월급을 조금 더 올려 155만원을 입금해주셨고, 대입 축하선물이라며 고질병이던 비염수술을 무료로 해주셨다.
정말 좋은 분이라고 다시금 생각이 들었고, 휴학을 하고 잠시동안 병원일을 이어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난 1학년 1학기동안 병원알바 재택근무를 해가며 꽤 큰 돈을 벌고 대학공부를 겸임했다.
매달마다 병원에 들려 소스를 받고 매일 강의가끝나면 집에서 마케팅 글을 썼다.
순식간에 1학기는 끝이났고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여름방학동안은 다시 병원에 출퇴근을 했다.
유쾌하신 원장님의 성격상 회식이나 가볍게 술마시는 일이 많았고 그때는 친구놈도 와서 같이 마시곤했다.
즐거웠다.
사회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내 능력을 인정받고 사는것 자체가 너무도 큰 행복이었으리라.
정정하겠다.
행복이 아니라 환상이었다.
2016년 7월 26일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블로그 UI를 새로 디자인하고 하이닥에 낼 코 수술 견적서를 오늘안에 끝내 내일 하루를 재택근무하기로 약속받았다.
그렇기에 그날은 밤까지 초과근무를했다.
(사실 이 무렵에는 병원일에 너무나도 몰입해있어서 출퇴근과 정해진 근무시간이라는 개념이 무뎌져있었다.)
내일은 월급날기념으로 일자리를 소개해준 불알친구놈에게 크게 한 턱 쏘기로 했었으니까.
그래서 난 밤 9시가 되는 시간까지 개인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고있었다.
슬슬 일이 마무리되고 퇴근을 하기 전 원장실에 다가가 똑똑 노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않자 나는 문고리를 돌려보았는데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원장님이 어디 나가셨나 해서 나는 그냥 문자를 남기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원장실의 문이 열렀다.
원장님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바지춤의 밸트를 정돈하고있었다.
그리고 원장실 안에는 실장님이 있었다.
실장님은 굉장히 당혹스런 표정으로 원장실 침대에 있는 이불에 몸을 감싸고있었고 원장님도 당황스러우셨는지 "어..어...민호 아직 퇴근안했었어?" 라며 말을 더듬었다.
그당시 나는 그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 할 수 있었다.
난 덤덤히 '네, 퇴근해볼게요.' 하고 병원을 나왔다.
원장님껜 사모님이 계셨다.
이상하게 사모님만 오는날이면 실장님이 오늘은 아프다며 휴가를 쓰시곤 했다.
원장님은 친구에게 대학 학비를 빌려줬다했다.
원장님은 실장님에게 강남 원룸 보증금을 빌려줬다했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 맞춰졌다.
아. 그런일이 있던거구나.
그랬던거구나.
그래서 그 친구는 부모님없이도 잘 살 수 있던거구나.
아.
씨발
이게 세상이구나.
사회라는게 이런거구나.
다음날 나는 집 밖에 외출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부재중전화가 8통이나 와있었고
카카오톡에는
'야 오늘 니가 한턱 낸다며. 니때문에 강남까지왔잖아'
'야 전화 왜안받는데'
'진짜 뒤진다 전화 받아라'
등의욕설이 수십개나 와있었다.
그리고 카카오톡에는
'민호야. 미안하다. 일은 여기까지만하자. 내가 이번달 월급은 지금 송금할게.' 라는 원장님의 메세지가 있었다.
역겨웠다.
그냥 역겨웠다.
세상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
무었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역겨웠다.
내 불알친구는 내 자살기도를 말렸다.
내가 학창시절 모두에게 따돌림 당하고 돈을빼앗기고다녔을때 그 친구는 나를 보호하고 나대신 신고하고 나랑 같이 피씨방을 가줬다.
나를 구원해준 친구였다.
내가 돈을 모두 빼앗겨 피씨방에 갈 돈이 없으면 그 친구는
'괜찮아. 누나한테 용돈 많이받았어' 라며 나를 피씨방으로 끌고오곤했다.
근데 난 그 친구에게 해줄수있는게 없었다.
너무도 역겨웠다.
내 자신이 이 세상이 역겨웠다.
이 세상 이 사회가 어떤식으로 되어있는지를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아직또 잠들기전 실장님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실장님도, 친구도 본 적이 없다.
그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겠지.
나는 그 때 이후로 두 번의 자살기도를 했다.
아무것도 변한건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겪은 사회 그대로. 이 세상은 흘러가고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꿀수없다.
기름을 찾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처럼
똥을 찾아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그저 벌레같은 삶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 수면제를 입에넣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