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한국전쟁 발발한지 6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인데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했던 업적이 워낙 다양해서
굵직한 것만 나열하겠습니다.
1.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했는데 이승만은 오전 6시 30분 서울 창덕궁 비원 반도지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이 들어와 전쟁 발발 소식을 보고했다.
옥신각신한 끝에 26일 오후 3시에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고 27일 새벽 4시 서울역을 출발해 낮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햇다.
하지만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조언 때문에 열차를 되돌려 대전에는 오후 4시 30분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동안 서울에서는 ‘국군이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방송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제서야 서울시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 진격할 것이라고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도 없이 폭파했다.
이로 인해 민간인 800명이 사망을 했다. 문제는 당시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서울시민들은 피난도 가지 못했다.
서울 수복 이후 피난가지 않은 시민들을 인민군 협력자로 간주해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4 후퇴 때 제2국민병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해 착복한 사건.
중공군이 한국전쟁을 참전하면서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은 정부는 중공군과 인민군에 대항하기 위해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됐다.
당시 이승만은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서 활약했던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육군준장 사령관으로 제의했지만 김두한은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소문이 났었다.(정확한 것은 없음)
그래서 신성모는 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추천해 육군준장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부사령관에는 윤익헌이 대통령으로 특별임명됐다.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대경험도 없었다.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하는데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횡령을 하면서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동사하거나 아사(굶어죽음)하게 됐다.
12월~2월 사이 50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됐으나 이들 중 아사자, 방사자, 동사자 등이 12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상으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 뿐만 아니라 손과 발이 절단난 사람이 20만명 정도 달했다.
1951년 봄 국회에서 폭로되면서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시영 부통령 역시 이승만 정권에 실망감을 느껴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찾아가 신성모, 김준연 및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외 방위군 간부들의 처벌을 건의했지만 이승만은 공비들의 술책이라며 현혹하지 말라고 대응했다.
3.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4. 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전향자들을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 감시할 기관이 필요하면서 1949년 6월 5일 조직했던 대한민국 반공 단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 및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가담이나, 기타 부역행위를 우려해 전국에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최소 1만 7천7165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됨.
‘골로 간다’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사건. 민간인 학살을 하기 위해 민간인을 끌고 골짜기로 주로 가서 학살을 했다. 이에 ‘골(谷)로 간다’는 표현이 나오게 됨.
5. 부산 정치 파동
1952년 5월 26일 이승만은 자신의 재선을 확실히하고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해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정치 파행 사건.
한국전쟁 발발하기 전인 1950년 5월 30일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면서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이승만은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회가 이를 부결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데모’를 동원해 국회의원을 위협했고, 5월 25일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해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5월 26일 야당 의원 50여명을 헌병대가 연행했고,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켰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는 사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