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쩍 벌어지는 조선일보 칼럼(펌)
한나라당이 10년 사이 잃어버린 것
송희영·논설실장
송희영·논설실장 아무리 선거판이라고 해도 ‘잃어버린 10년’ 논쟁은 잘못된 이슈다. 지난달 노무현 대통령이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한 후 한나라당이 분실물 목록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그저 선거판의 안줏감으로 흥미로웠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정권을 잃어버렸던 10년 세월을 경제와 안보를 망친 10년이라고 공격할 만했다.
그러나 이번 주 잇단 여론 조사에서 ‘잃어버린 10년’을 사실로 믿는 국민이 다수인 것으로 집계됐다. 사정을 알만한 경제 전문가 중에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경제를 퇴보시켰다고 몰아세우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만세 삼창해도 아쉽지 않을 홍보전의 승리지만, 이는 여론을 엉뚱한 길로 몰고 가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잘못 가르쳐 주는 선동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에서는 80년대의 남미처럼 인플레가 수천%씩 치솟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쿠데타가 쿠데타를 부르고, 어쭙잖은 미국식 경제 실험으로 절대 빈곤층이 증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90년대의 일본처럼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하락하는 가운데 경기 침체가 장기화했던 것도 아니다.
10년 전 이맘때 한나라당 집권 시절에는 나라경제가 부도직전까지 몰렸지만, 그 후 외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게다가 4~ 5%의 성장을 지속해 왔고, 1인당 국민소득도 늘었다. 남미와 일본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통했던 시대와 한국의 지난 10년은 전혀 다르다.
외국 전문가들에게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 논쟁이 있다고 하면 “농담 말라”며 피식 웃어버리거나 “진담이냐”고 깜짝 놀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한국은 전세계를 유람하는 호황 유람선에 승선(乘船), 적지 않은 글로벌 기업을 키우고 IT 혁명을 이뤄냈으며, 매년 1000만명 이상이 해외 여행을 즐겼다. 두 정권이 예뻐서 두둔하거나 편들려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론 여론이 두 정권에 야박한 이유는 있다. 무엇보다도 잘할 수 있었던 시절에 북한 지원이나 과거사 정리 같은 일에 곁눈질하느라 경제 성장의 속도를 더 내지 못한 죄가 크다.
중국, 러시아, 인도는 그 사이 신흥 성장 국가로 우뚝 서버렸다. 이웃 일본은 10년 불황에서 깨어났고, 영국과 미국은 10년 이상 호황을 누려 왔다. 마치 100점짜리가 수두룩한 한 교실에서 80점, 90점짜리는 낙오자가 되고 마는 글로벌 경제 현실을 우리는 절감했다. 한국은 호황 유람선에 탔을 망정 1등석에 가지 못한 채 2등석, 3등석을 서성거린 격이다.
지난 10년에 대한 상실감이 부각된 또 다른 이유는 사회 전체에 만연하는 불안 의식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세계화의 충격파 속에서 언제든지 직장을 잃을 수 있고, 연봉이 걸핏하면 삭감될 수 있는 무거운 쇠망치를 매일 머리 위에 얹고 살고 있다.
자녀를 해외 유학에 보내면 자칫 가정 파탄까지 각오해야 하고, 기업인은 언제 M&A(인수 합병) 당할지 모르는 고(高)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나 칼바람을 걱정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이런 위기감이 한국인들에게 뭔가 소중한 것을 몽땅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끼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전문가 중에는 양극화 확대를 그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주식에 투자한 친구가 수억을 챙겼을 때, 단골 병원 의사가 외제 승용차로 출근하는 모습을 볼 때, 대기업에 들어간 동창이 수천 만원의 연말 보너스를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오직 나 홀로 뒤처진 듯한 박탈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전국민의 80%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과반수 넘는 가정에서 같은 시각에 시청할 때는 이웃이 19인치 TV를 사더라도 그다지 가난한 줄 몰랐다. 누구나 곧 장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52인치 PDP를 거실 벽에 붙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중산층의 패배 의식이 만연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은 객관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집단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정략적으로 선동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 집단적인 패배감과 상실감에 휘발유 끼얹고 불을 댕기는 수법이야말로 바로 남미의 실패한 권력자들이 써먹었던 극단적이고 위험한 포퓰리즘이다.
죽기 전에는 사람이 변해서 착해진다던데...
이거야 원 한겨레 논설인지.. 조선논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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