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종교논쟁을 벌이자는건 아니지만
특정종교인들이 불교를 폄하할때 가장 많이 쓰는 내용이 바로 저겁니다.
"금불상에 절하는 불교같은건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종교가 어떤지에 대해서 논의하려는 건은 아니고
그렇다면 왜 불교는 금불상에 절하는지 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불교에서 절은 금불상에다만 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절은 불교의 수많은 수행 방법 중 하나인거죠...
기도를 하면 일단 마음이 안정되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어온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의 중생업장과 번뇌망상이 녹아내립니다. 자연스레 매사에 긍정하고, 자신감이 생기고, 모든 이들에게 자비심으로 대하게 되어 주변이 다 편안해지니 갈등이 남을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피이지요. 그러한 마음의 깨달음이 중요하고 소원성취는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에 불과한데 소원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꽉 찬 상태에서 욕심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그렇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부처님의 대원력, 관음보살의 대원력을 닮겠습니다. 여태까지 지은 죄업을 참회하겠습니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부처님의 원력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제자가 되겠습니다.’하는 발원으로 기도하다 보면 모든 일이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 성일스님, 월간 불광 1989.10 中 -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의 기도는 일종의 수행이예요...
본성이 부처인 불자들이 기도를 통해 그 불성을 발현함으로써
바라던 소원을 부가적(?)으로 얻는 방편인거죠...
원효스님이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하면 극락갑니다."라고 하신건
그 기도수행의 일종인 염불에 해당합니다.
염불 수행은 본래 부처님 당시로 올라갑니다. 부처님이 옆에 계실 때와 같이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으나 스스로 공부가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때 부처님께서는 나를 떠올려서 나를 생각하고 내 가르침을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의 법을 생각하고 명상하라 하셨는데 이것이 글자 그대로 염불(念佛, 부처님을 생각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을 떠올려서 부처님께서 정진하시는 모습과 자비로운 모습과 가르치는 모습을 관하면서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께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잊지 않고 명상하는 것으로 본인들도 부처님과 같이 수행정진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 혜봉스님, 월간 불광 2000.08 中 -
염불(念佛)을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지금(今)의 마음(心)이 바로 부처(佛)’라고 풀이 됩니다. 즉 ‘염불하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계속 염하다 보면 어느덧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에 공명되어 마침내 불성이 외부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 박혜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도법 中 -
불교에서 극락의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되기도 하고
불경에 극락의 아름다움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불성을 깨친 인간이 서있는 그 곳 자체가 그냥 불국토이고 극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절대신이라거나
극락행 기차표를 끊어주는 분이 아니라는거죠...
그래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의심하고 의심하라고 합니다.
자기가 말했다고 그냥 믿지 말라고 하셨죠...
다만 삼보(불법승:부처,불법,승가)에 귀의하라는 의미는 있습니다.
근데 그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을
닥치고 찬양하고 믿어라 하는거랑 좀 달라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God is your back!" 같은 의미예요...
모든 중생은 불성을 타고났지만 번뇌가 그 불성을 가리고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불성을 혼자서 깨치기 힘드니까
본인의 뒤에 삼보가 있음을 믿고 마음 편하게 수행에 전력하라는 의미예요...
절 이라는 것은 위의 염불이나 기도와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금불상으로 논의를 되돌려 봅시다.
그런데 '금불상에 절을 한다.'라는 내용은
부처나 불교의 사제인 승려들이 신도들에게 시킨 내용이 아니라
신도들의 자발적인 행위가 쌓여서 문화적 관습으로 굳어진 거예요...
애초에 불상이라는 것 자체가 초기 불교에는 없었고
몇세기가 지난 후에 신도들 스스로가 예배를 올릴 대상이 필요했기에
자발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겁니다.
(이 부분은 다른 종교도 비슷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불상에 신도들이 금박을 입히기 시작했죠...
'왜 하필이면 금이냐?'라는 의문이 드실겁니다.
금은 고대부터 모든 이들이 탐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금 자체의 화려한 광택도 물론이거니와 금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보존성은
전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금의 가치를 고대부터 높게 만들어주었죠...
그런 탐나는 금 조차 보시하는 마음을 신도들 스스로 냈던겁니다.
그럼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의 의미를 알아보죠...
보시의 공덕을 베푸는 이는 큰 복을 받게 되나니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탐욕과 분노가 없기 때문이다.
-법구경-
불교에서의 보시는 보시를 하는 이의 공덕을 위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꼭 절에다 보시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불자로써 보살행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봉사단체에 보시를 하는것도
절에 시주를 하는것 못지 않게 공덕을 쌓는다고 말하고 있죠...
실제로 보시를 강요하는 절 거의 없습니다.
불전함에 불전 내는것도 그냥 자기가 내고 싶으면 알아서 내는거고
예불때 불전시간이 따로 있는것도 아니예요...
그리고 보시를 하는것에 대가를 바라면 그 공덕이 사라져 버립니다.
위에 소개한 법구경의 구절처럼 보시를 하는 행위 자체보다는
탐욕과 분노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보시를 하게하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불교에는 재물없이 보시하는 일곱가지 '무재칠시'라는것이 있습니다.
1. 안시 -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여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것
2. 화안열색시 - 자비롭고 미소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
3. 언사시 - 공손하고 다정한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
4. 신시 -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
5. 심시 -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6. 상좌시 -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7. 방사시 - 방에 재워주는 것
(무재칠시 부분은 정락스님의 법문집 '나는 이렇게 살고싶었다.'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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