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10년, 농락당한 애국심
[호]
IMF는 국제투기자본의 대리인
신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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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10:46:25
“한 할아버지가 입고 온 마고자 금단추를 즉석에서 뜯어내 맡길 때는 직원들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시어머니가 물려주신 금비녀를 들고 나온 할머니, 결혼 패물로 받은 금목걸이와 반지를 갖고 온 새댁, 대기번호표 인출기 주변에서 금을 싼 보자기를 어루만지다 결심이 선 듯 번호표를 뽑는 아주머니 ….”
“평생 몸담았던 회사에서 받은 ‘30년 근속기념 행운의 열쇠’도 있었고, 한 70대 할아버지는 ‘틀니를 하면서 뺀 것’이라며 금니 6개를 기증했다”
-1998년 1월, 금모으기 관련 일간지 기사 중추천 수1�� ���縦 Ʈ���ͷ� ������
1997년, 국민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격으로 IMF를 맞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은행과 민간연구소들은 6월 무역수지가 40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서고 상반기 물가상승률도 10년 만에 가장 낮다며 97년 경제성장률을 5%대에서 6%이상으로 상향 조절했다(매일경제 1997. 7. 16).그렇게 불경기 끝에 숨통이 좀 트일 줄 알았던 나라경제가 갑자기 외화가 부족해 망하게 됐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미국에 의해 유도된 외환위기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상황이 바뀔 수 있었을까?
미국은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후, 90년대 초부터 계속해서 한국에 자본시장 개방압력을 가한다. 김영삼 정부는 그 압력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라는 떡고물과 교환하며 받아들인다. 일단 자본시장이 개방되자 지구 곳곳을 떠돌던 거대한 국제금융자본 1000억 달러 이상이 빠른 속도로 한국으로 유입된다. 이에 은행들은 외국에서 마구 돈을 빌려오고, 기업들은 해외와 다른 영역으로 손을 뻗치며 과잉투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1993년 400억 달러 수준이었던 외채 규모는 1998년 150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됐으며, 1997년 한보철강을 필두로 한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금융기관 부실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닥친 97년 후반 월가의 큰손들이 한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일시에 빼내가면서 초유의 국가부도사태 직전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국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한국정부가 꼼짝없이 국제통화기금(IMF) 앞에 무릎 꿇도록 유도했다.
한국에 대한 IMF의 강도 높은 요구가 미국의 작품이란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제임스 루빈 재무장관과 앨런 그린스핀 연준위 의장은 추수감사절 휴가를 함께 보내면서 IMF가 강경조건들을 고수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임창열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협상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데이비드 립튼 재무부 부차관보를 서울에 급파했다.
△금모으기 운동에 참가한 시민들의 모습. 이렇게 모은 금이 3달 동안 무려 225톤(21억 7천만 달러 상당)에 이른다.
국제투기자본의 압력에 기업과 은행, 정부가 맞장구치다가 IMF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우선 나라를 살려야 한다며 장롱 속 금반지를 꺼내며 눈물겨운 애국심을 발휘했다. 98년 1월 초부터 3달 간 349만 명이 참가, 225톤(21억7000만 달러 상당)에 이르는 금을 모아 수출했다.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겠다는 국민들의 강한 의지와 연대가 있었던 결과, 본래 예정했던 기간을 3년 단축해 21개월 만에 IMF로부터 빌렸던 긴급자금 134억 달러를 다 갚을 수 있었다.
기업과 나라가 살아났지만, 그 이면에는 죽음으로까지 몰린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99년 9월까지 IMF가 요구한 재벌개혁에 따라 현대, 삼성, 대우, 엘지, 에스케이 등 5대 재벌 직원 가운데 6만 3천여 명이 정리해고 등으로 직장을 떠났다. 이는 구제금융사태 이전 노동자수 61만 3천명의 10.3%에 이르는 숫자다. 그밖에도 은행 2만 3400명, 보험업계 1만 2천명, 증권업계 5100명, 공무원 등 공공부문 5만 3천여 명도 퇴직당했다. 실망실업자까지 포함해 실업자는 200만명이 넘어섰으며, 거리는 노숙자로 넘쳐났다. 요행히 회사에 남게 된 사람들은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다가 과로사하기도 부지기수였다. 생활고에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결국 자살을 택하기도 해 98년 한 해동안 자살한 사람이 8569명으로, 97년에 견줘 42%가 증가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상태에서 막대한 해외 차입 자금을 갚아야 할 긴박한 상황에 처한 한국정부는 IMF가 제시한 프로그램들, 즉 '국내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 인수합병 규제 철폐'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 '외국인의 국내 단기금융상품 매입, 국내 회사채 시장에 대한 투자 무제한 허용' '정리해고, 파견근로제 도입 등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실업률 증가 초래하는 98년도 경제성장률 목표치 하향조정' '개별 기업 구제 위한 정부 보조금 지급 금지' '시장금리 인상' '교통세 등 간접세 인상, 조세감면 대상과 폭의 축소' 등을 받아들임으로써 IMF 긴급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IMF로부터 빌릴 빚은 갚을 수 있었지만, 외환위기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국민들의 삶은 끝없이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킨 애국심이 철저히 짓밟힌 채, 국민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IMF가 현재진행형이다.
IMF는 국제투기자본의 대리인
OECD가입 후, 정부는 줄곧 ‘세계화’를 통해 선진국으로 달려가자고 부르짖었다. 국민들은 정부가 가리키는 대로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 시대’로 숨 가쁘게 달려갔지만, 결승점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국제투기자본이 쳐놓은 함정이었다. 예상 밖의 추락,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렵고 막막했다. 외환위기의 구원자라 믿었던 IMF와 해외자본의 요구대로 은행도 팔고, 기업도 팔았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내놓는 정리해고에 합의하기까지 했다. 오직 한국경제가 다시 살아나기만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해외자본은 결코 한국경제를 끌어올릴 구원자가 아니었다.
IMF는 우리나라의 경제시스템을 완전히 바꿀 것을 요구했다. 한국정부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IMF의 요구를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사태에 당황해 갈팡질팡하다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경제주권을 내주면서 국제금융자본의 진출 통로를 최대한 넓혀준 것이다.
출처:경제 - IMF 10년, 농락당한 애국심 from 월간노동세상(http://laborworld.co.kr)
우리나라 37대 기업들의 외국인 지분
국민은행 85%, 외환은행 74%, 하나은행 81%, 신한은행 64%, 부산은행 62%, 대구은행 65%, 우리은행 11%, 제일은행 100%, 시티은행 100%...
삼성전자(이건희 주식지분 1.85%) 54%, 삼성전자(우) 82%, 삼성화재 54%, 삼성르노자동차 70%, 현대자동차 47%, 기아자동차 25%, GM대우자동차 67%, SK(유공) 52%, S-Oil 51%, 현대오일뱅크 84(?)%, SKT 49%, KT 46%, 한국전력 74%, 포항제철 70%, LG전자 44%, LG필립스 55%, 하이닉스 21%, KT&G 61%, 신세계 46%, 롯데쇼핑 25%, 현대백화점 46%, 현대중공업 19%, 현대산업개발 67%, 대림산업 61%, GS건설 47%, 현대건설 13%, 대우건설 9%, 금호건설 14%...
국내 은행 지분
국민은행 : 84.97%
신한지주 : 57.86%
하나금융지주 : 81%
우리금융 : 11.08%
외환은행(론스타 매각전) : 73.97%
부산은행 : 61.66%
대구은행 : 64.56%
전북은행 : 34.39%
제주은행(신한지주 계열) : 0.12%
기업은행 : 20.44%
2007년 기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