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장관 중에 박정희대통령의 말에 거의 100% 반대한 분이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무사한 분이 있었다
' 최형섭 '
“대통령의 지시를 95%나 반대했다면?”
윤 영관 외교부 장관의 경질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윤영관 전 장관도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편이지만, 그 노선이 상당히 ´자주적´이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외교부 장관으로 발탁이 되었고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할 가능성이 가장 큰 장관으로 꼽혔었다. 그는 북한의 입장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정일의 입장을 중재자 입장에서 가능한 한 미국에 이해시키려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덜 자주적´이라고 북미3과장의 ´부적절한´ 말을 계기로 단숨에 쫓겨났다. ´외교부는 대통령의 손과 발´이라는 말로 그로서는 최대한 몸을 낮췄지만, 대통령의 분신인 국가안보회의의 사무처가 벼르고 던진 칼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관 중에 대통령의 말씀에 거의 100% 반대한 분이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무사한 분이 있었다. 그냥 무사한 게 아니라 그 대통령 아래서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7년6개월 장관직을 지켰다. 지엄하신 각하의 말씀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까지 했다. 많은 한국의 지식층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런 대통령을 독재자로 폄하한다. 그에 대한 증오심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고 그 장관은 최형섭 전 과기처 장관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의 대가로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무상원조 5천만 달러를 받았다. 1964년 11월 30일에 건국 이후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으니까, 당시에 그것은 엄청난 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그 돈을 전액 과학기술진흥에 쓰기로 결정하고 이 일을 최형섭 박사에게 일임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초대 소장으로 임명만 받았지, 건물도 사람도 없었다. 여 직원 한 명과 예산을 줄 경제기획원 직원 한 명 이렇게 셋이서 청계천 어물전 옆에서 파리를 쫓으며 사무실을 열었다. 그렇게 경비를 아꼈다. 대신에 해외에서 과학자를 유치하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유명한 일화 둘.
서울대 교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니, 지들이 뭔데 우리 월급의 3배나 받아, 잉?
--여보시오,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라 당신네도 그렇게 받도록 노력해 보시오.
대통령이 허허 웃으며,
--소문대로 나보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이 수두룩하구먼.
--각하, 제 월급은 깎아도 그들의 월급은 한 푼도 깎으면 안 됩니다.
--음, 계속 그렇게 받도록 하시오. 장관 월급도 깎지 말고.
최형섭 박사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KIST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응용 기술 위주의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KIST´를 이공계 대학생들이 책상머리에 크게 써 붙이고 죽으라고 공부하게 만들었다. 기술의 일본이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이 당시에 이미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여 중소기업 중심으로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개발해 주고 로열티를 받아 일부는 개인이 갖고 나머지는 부서의 공동 기금으로 편입하여 국가 예산 외에 따로 자금을 확보, 모든 부서가 경쟁적으로 나날이 발전할 수 있게 했다. 이 당시 KIST 직원의 월급은 극비 사항이었다. 누가 얼마 받는지 연구원끼리도 서로 몰랐다. 하여튼 개인과 팀의 성과에 따라 대통령의 월급을 능가하는 사람이 속출했던 것이다.
최형섭 박사는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게 된다. 이 때 그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과학기술의 아마추어인 행정관료보다 전문가인 과학기술자의 직급을 올려 버린 것이다. 국회에서도 과학기술에 관한 예산은 무사통과하게 만들었다. 감사도 안 받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전문가에게 믿고 맡겼던 것이다. 이런 그가 집이 없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특별히 사 준 집을 퇴직하면서 국가에 헌납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최형섭 장관은 수시로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를 받으며 경제의 기초가 되는 과학기술을, 나사 하나 못 만들던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주로 1970년대에 ´공돌이 배움터´라고 스스로 비하하던 공대를 획기적으로 지원, 새로운 공대도 많이 설립하고 기존 공대는 그 정원을 대폭 늘리고 시설을 최신식으로 바꾸어 주었다. 경제가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기능공도 태부족했다. 과기처가 앞장서서 머리 좋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기능공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쳐 주었다. 서울공고와 서울공대의 학생들은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정치가 불안해도 이들은 무풍지대에 사는 듯했다. 이 당시 공대생은 데모도 할 줄 몰랐다. 찬란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탓이리라.
이 때의 공고생과 이공계 대학생들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 정책은 IT 지원 외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엉망이 되었다. 이제는 우수 학생들이 적성을 살린다, 소신 지원한다, 어쩌며 우르르 기껏 제 한 식구 잘 먹고 잘 사는 의대로 몰려가고 있다. 희망이 없는 불쌍한 세대이다. 아무리 이름 없는 지방대의 의대도 이젠 서울대 공대에 뒤지지 않는다. 25년간 과학기술 정책이 표류한 업보이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최형섭 장관은 과학기술에 대해 늘 아는 척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때마다 무안을 주었다. 아첨이란 걸 몰랐다. 95% 반대했다. 포병장교 출신은 다 그렇듯이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상식과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일류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박사 논문이 아직도 미국의 대학교재로 쓰이는 세계적인 과학자인 최형섭 장관이 보기에는 하나같이 ´맹한´ 소리였다. 그가 반대할 때마다 대통령은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는 최형섭 장관의 말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되면 며칠을 두고 숙고하다가, 결국 최형섭 장관의 말이 맞다며 그대로 하라고 재가했다.
최형섭 장관의 회한 섞인 말이다.
--나도 너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을 떠나 한 인간의 입장에서 5%는 그분의 말을 따를 걸.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이야...
(2004. 1. 16.)
[출처] CEO 박정희의 과학기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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