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팔로 뉴욕주립대 총장이였던 스티븐 샘플이 지은 "창조적인 괴짜들의 리더십"에서 요약함..
자유언론, 속박 없는 언론은 우리의 민주정부 형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비록 이같은 절대자유가 가끔 무고한 사람과 단체에게 큰 해악을 끼친다하더라도, 그리고 때때로 대중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세상 모든 돈을 준다고 해도 바꾸거나 수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뉴스미디어는 리더에게 특별한 문제를 안겨준다. 토마스 제퍼슨(미국의 독립운동가)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1807년 무책임한 신문보도에 낙심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글을 편지에 남겼다. “신문을 절대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읽는 사람보다 더 정보에 밝다(The man who never looks into a newspaper is better informed than he who reads them). 거짓과 잘못으로 가득찬 마음을 가진 사람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은 그래도 큰 사실들을 알게 될 기회가 남아있다. 신문에 난 자세한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이 말은 후에 다듬어져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남겨졌다. “전혀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 정보에 더 밝다(The man who reads noting at all is better informed than the man who reads noting but newspapers)."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제퍼슨의 금언을 2세기 전 무책임한 기자들이 판치던 나라에 살았던 한 리더의 과장된 화풀이 같은 것으로 내쳐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과연 오늘날에도 이 말이 타당성이 있을까?
버펄로 뉴욕 주립대학 총장으로 있던 1980년대 중반, 나는 제퍼슨의 금언을 현대적 맥락에서 테스트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6개월 동안 모든 신문과 잡지 읽기, TV뉴스보기를 중단했다. 물론 이 실험이 대학총장으로서의 직분이나 대학 자체에 피해를 줄 경우 언제라도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실험을 시작한 뒤 처음 2주일은 아주 힘들었다. 정말로 신문이 보고 싶어 신문 가판대 앞을 지날 때 곁눈질로 제목이나마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담배를 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 주가 지나면서 나는 새로 발견한 자유의 느낌과 자율의 느낌을 맛보았다. 내가 대중매체에 중독되어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울러 지금까지 나는 지적 독립성의 큰 부분을, 나와 핵심적 가치관과 관심이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닌 일단의 편집자들과 기자들에게 내맡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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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뉴스매체의 숨겨진 문제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과 무시해야 할 것을 남에게 결정하도록 맡겨놓는 다는 것이다.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뉴스 스토리의 내용뿐만이 아니다. 어떤 기사가 다루어지고, 또 그 기사를 어떤 사람이 다루는지, 기사가 신문의 어느 위치에 실리는지(예컨대 1면에 실리느냐 42면에 실리느냐 또는 1단기사인가 4단 기사인가 하는). 또 특정 기사의 사진이 실리는지 실리지 않는지, 실린다면 몇 장이나, 또 어떤 사진이 실리는지도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리더들 중에는 <뉴욕타임스>의 섹션A면에 실리지 않는 것은 알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아는 것은 간단하다. 50년 전 <뉴욕타임스>를 읽어보면 된다. 나중에 중요한 것으로 판명 난 사건들이 그 당시에 과연 중요한 기사로 다루어지고 있었는가? 1951년 베트남에 관한 기사가 1면에 다루어졌는가? 인종차별, 트랜지스터, 컴퓨터, 우주탐사, 대기오염 등이 중요 기사로 다루어졌던가? 대개 1면 기사는 덧없는 관심사들에 집중했다. 오늘날과 꼭 마찬가지다. 여기서 신문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대중의 분위기와 그 당시의 기분을 반영하는 것,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와 우리가 읽고 싶어하는 것을 인쇄하는 것, 그것은 신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불행히도 뉴스미디어에는 패션업계와 오락업계처럼 강한 군집본능이 있다. 물론 신문 개별적으로는 편집국 내부, 혹은 사설란의 독특한 집단정서(예컨대 진보적 혹은 보수적인)가 있다. 그러나 언론계 전반에 걸친 일종의 집단적 정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디어 내의 이러한 경향은 리더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위험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수년 전 한 소련인 방문객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의 말은 이런 요지였다. “당신들 미국인들은 이만저만 인상적인 게 아니다. 당신들은 자유언론이 있고 비밀경찰이 없으면서도, 대단할 정도로 사상통제가 가능하다니!”
제퍼슨이 지적했듯이 신문은 종종 사실을 잘못 입수한다. 어쩌다 신문1면에 나간 기사에 포함된 일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같은 현상에 관해 말했다. 이러한 사실 왜곡은 일반적으로 기자의 악의에 기인하는 게 아니다. 사실이 왜곡된 기사들 중에는 거기에 포함된 인사들에게 유리하게 기사가 쓰여진 경우가 많다. 사실왜곡은 그보다도 기자에게 취재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 경우(마감시간에 쫓기거나 특종을 빼앗길 우려에서)나, 아니면 단순히 기자의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인으로서의 윤리문제가 있다. 기사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편향되게 쓸 경우 윤리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인간도 선입견을 갖지 않고 어떤 조사를 시작할 수는 없다. 과학자도 기자도 이 점에서는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과학자는 실험의 결과가 가설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면 자신의 가설을 버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자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 가설이라 하더라도 기사가 명명백백한 조작이나 사실상의 잘못이 없는 경우, 그 이야기를 신문에 내는 데 윤리적으로 부담에서 자유롭다. 만약 과학자가 기자와 똑같은 일을 할 경우 그 과학자는 호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언론의 이 같은 독특한 윤리적 원칙은 민주정부 형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기자가 자기의 믿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갖기 이전에도 공인(公人)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원칙 때문이다. 기자가 자기의 취재대상에 대해 기사화하는 내용이 사실인 한, 기사화된 내용이 취재대상이나 기사에 나오는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방적으로 악의적인 비방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론의 윤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기자는 때때로 존경심이라는 두터운 외투로 일시적으로 숨어 있던 못된 사람을 폭로해 내기도 한다. 물론 다른 경우 이 같은 편향적 저널리즘은 대체로 정직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시민들의 명예와 경력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열심히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다. 직접 부딪쳐보도록 하자. 당대의 생각에 정통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신문의 편집자들과 기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을 매일같이 이런 위기, 저런 문제, 그리고 이러저러한 인간관심사에 끌고 다니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다음과 같이 신문에 대해 과거보다도 훨씬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창조적 신문 읽기 방법>
1- 내가 신문을 읽을 때, 나는 주로 오락 때문에 신문을 읽는다는 사실을 안다.
2- 신문이 누군가를 공격할 때, 신문이 단순히 무시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가볍게 다루는 공격대상 당사자 쪽에 유리한 사실이나 주장이 있다는 점을 유념한다.
3- 나는 각 개별 신문의 특징이자 미디어 전반의 특징인 군집성향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4- 나는 기자나 편집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다중의 회색 그늘이라는 사실, 대부분의 신문기사는 미덕과 악덕, 선과 악이라는 윤곽이 뚜렷한 흑과 백의 이분법에 의해 쓰여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5- 나는 신문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흔히 있다는 사실,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느리지만 강력한 저류는 신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탐지하기 아주 힘들고, 감동적인 기사로 다루기가 아주 어렵다는 점을 유념하고자 노력한다.
6- 나는 최고의 신문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잘못 입수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신문을 읽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신문을 읽지 않을 때, 내가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신문은 어쩌면 연속극과 같다. 며칠 동안 안 보고 지낼 수 있고 나중에 돌아와서도 박자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지적 독립성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나는 1주일 정도 신문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기 위해 전과 반대의 행동을 취한다는,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에서 커다란 훈련이다.
...옮기다가 문득 이런 펌글도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사람이 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혹시 논술준비하느라고 신문을 열심히 읽는 학생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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