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만약 오늘날 사람들이 안락과 풍요로움을 뒤좇다
놓쳐 버린 고결함과 섬세함을 아쉬워할 줄 안다면,
그런 고결하고 섬세한 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법이란 애당초 힘센 자의 권리였으며
인류에게 피로 물든 역사로 대물림된 압제에
언제나 봉헌해 왔"다는 크로포트킨의 말을
오늘날 손배 가압류로 노동자들과 노동 운동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기울어진 저울"은
어떻게 부인할 것인가.
1880년 크로포트킨이 쓴 이 격문이자 외침이요,
그리고 당시대 청년들을 향한 호소였던 [청년에게 고함]은
그로부터 정확히 134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과
이 시대 청년의 가슴을 끓게 할 결기를 담고 있다.
"그동안 쌓아 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꿈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꿈을 실현하려 무엇을 할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토해 내는 크로포트킨의 울분을, 그 호소를 쉽게 뒤로할 수 있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옮긴 홍세화는
"크로포트킨이 살았던 격동의 시대나 이 책을 일역본으로 읽으면서 젊은 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을 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젊은이에게 이 문건이 도대체 무슨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은
"시대에 따라 전쟁의 참상이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전쟁 자체는 사라지지 않듯이, 사회의 모순과 편견, 불평등과 부조리가 낳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비참함은 그 모습만 달리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대 상황의 차이에 놓여 있지 않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있다."
라는 자명한 답을 품고 있다.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은 이 소책자를 읽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크로포트킨은 "여러분 앞에 놓인 첫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입니다."라며 첫 운을 뗀다.
그런 뒤 크로포트킨은 차례로 여러 군의 사람들을 소환한다.
의사가 되려는 사람에게"한 여인은 평생 충분히 먹지 못하고 충분히 쉬지도 못해 죽어 갈 때, 다른 한 여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껏 노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수척해지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외치고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노동자들이 15일의 예고 기간을 지키지 않고 기업주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서겠습니까? 법의 편에, 즉 경제 위기를 이용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긴 그 사업주 편에 설 것입니까? 아니면 법의 반대편, 즉 2.5프랑의 임금밖에 받지 못해 아내와 아이들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노동자 편에 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또한, 엔지니어에게는 과학이 소수의 사람을 위해 쓰일 때 어찌할 것인지, 교사에게는 모두를 위한 인간적인 교육을 고민하지 않을 수 있는지, 예술가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차례로 묻고 있다.
그러면서 크로포트킨은 끊임없이 되묻는다.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많은 이들이 이런 상황 앞에서 당연히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제기랄! 추상 학문은 사치에 지나지 않고 의술의 실행은 사술邪術일 뿐이며 법은 불의에 지나지 않고 기술의 발견이 착취의 도구라면, 실천가의 지혜에 맞서는 학교는 극복되어 마땅하고 혁명적 사상이 비어 있는 예술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크로포트킨은 이에 답한다.
"의사인 당신은...... 병 자체보다 병의 원인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병의 원인을 제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당신의 메스를 들고 우리에게 오십시오. 파탄의 길에 들어선 이 사회를 확신에 찬 손으로 해부하십시오."
"시인, 화가, 조각가, 음악가인 당신은...... 오늘의 삶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인민에게 보여 주고, 이 추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우리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십시오."
물론 회의도 좌절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체념했을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감하지 못하는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모든 세대 전체가 똑같은 숙명을 참고 견뎠는데 어떻게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어. 나 또한 그저 겪는 수밖에. 그러니 일이나 하세.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 보도록 애써 보세.’ 좋습니다! 하지만 삶 자체가 당신을 일깨워 주겠지요."
그렇게 당시 젊은이들이, 그리고 어쩌면 우리 시대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구석구석 되짚으면서 결국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성실한 청년인 당신, 남자든 여자든, 농민, 노동자, 피고용인이든 병사든, 당신은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작은 무리에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겨
냥하는 위대한 목표를 이루기에는 아주 약하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가 방향만 반대로 돌리기만 해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던 사관들을 파랗게 질리게 할 수 있습니다. 고통받고 모욕당한 우리는 거대한 대중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릴 수 있는 대양입니다. 우리가 의지를 가진다면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한순간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30여 년이 지난 이 외침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책을 옮긴 홍세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 속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낙오하고 희망을 잃어 가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대응도 포기하고 주어진 운명에 우리의 미래를 그냥 맡기기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 세기도 더 전의 크로포트킨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