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여섯, 뭐한다고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유튜브에서 "박항서 매직, 베트남 현지 반응"이라는 동영상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아 여기가 내가 첫 여행을 가야 할 곳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2002년, 신촌 거리에서 거리응원하며 세상 행복하던 스무 살의 제가 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베트남 하노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베트남 저가항공으로 보이는 비엣젯항공의 티켓 가격이 왕복 32만원이었고, 새벽에 떠나는 것은 23만원까지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한항공 직항으로 좋은 시간에 타면 50만원이 넘는 것 같고요.)
그때가 베트남이 16강전에서 바레인을 1:0으로 이긴 직후였습니다. 저는 3박4일, 첫날 저녁에 베트남VS시리아 8강전을 보고, 마지막날 저녁에 (그러니까 오늘) 베트남VS한국의 4강전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리랜서라서 3일 정도 일이 없었고요. (아... 이건 슬프네요.) 한국도 베트남도 8강에서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서 더비'가 성사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네요.
8강전 경기는 하노이 호안끼엠에서 보았습니다. 올드쿼터, 우리로 치면 구시가지라고 하는데, 대충 하노이의 광화문쯤 된다고 해야 될까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그렇습니다. 여행자거리의 12인 도미토리룸을 잡았는데 조식포함해서 하루에 7천원입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가격인가요... 베트남 오셔도 오래 계실수록 비행기 티켓 값을 벌 수 있어서, 사실상 한국 체류비용하고 거의 비슷해요.) 영화에서 보던 여러 장면을 상상했는데, 근육/문신/수염/백인/남성들만 드글드글 하네요. 여행자거리의 맥주거리에 나가니까, 몇몇 술집에서 빔프로젝터를 이용해서 중계를 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중계를 보면서 받은 인상은, 베트남 사람들 모두가 무척 간절하다는 거였어요. 베트남 선수가 공을 잡고 상대 진영으로 들어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환호소리가 나는데, 그건 2002년에 이탈리아나 스페인전을 보던 우리와 똑같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격렬하게 응원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상대편이 파울하면 일어나서 욕도 하고 "빨간색! 빨간색!"하고 한마음으로 레드카도 외치고 그랬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앉아서 리액션 없이 관람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런 30명 정도 들어갈 만한 규모의 술집에 저마다 모여서 축구를 봅니다. 거리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쟤들 뭐하나, 하는 백인 여행자들이 종종 지나다니는 정도였습니다. (걔들은 축구인지 뭔지 별로 신경도 안 쓰더라고요.) 지금 저 사진에는 박항서 감독님이 나왔는데, 화면에 잡힐 때마다 베트남 사람들이 박수를 치거나 무언가 좀 경건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2002년에 히딩크 감독을 보면 고마움, 미안함, 예수님 보듯함, 하는 감정들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저는 타국에서 박항서 감독님 얼굴 보니까 괜히 뭉클하고 "내가 박항서의 나라에서 왔다!"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사랑해요 바강서...
제가 먹은 안주입니다. 닭고기튀김과 당면을 넣은 돼지고기 튀김, 뭐 그런 것이네요. 베트남 요리의 특징은 고수는 당연하고 여러 라임 채소들이 토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에요. 저는 거의 걷어내고 고기 위주로 먹었습니다. 가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보통 7만동, 한국돈으로 하면 3,500원 정도입니다. 맥주도 1만동, 한국돈으로 500원이면 먹을 수 있습니다. 돈 걱정은 안 하고 먹어도 되는 수준이에요. 신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음식이 맛있습니다.
연장 후반에 들어가서, 베트남이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뻐했고 저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어, 그런데... 그냥 같이 온 사람들끼리만 좋아하더라고요. 우리는 다른 테이블하고도 건배하고 하이파이브하고 위아더월드였는데, 그건 조금 의외였습니다. 앞에서 기뻐하는 베트남인에게 축하한다면서 하이파이브를 한 번 하고 다시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민망...)
경기가 끝나기 1분 전쯤, '베트남 꼬레!'하는 음악이 어디선가 크게 들려오더라고요. 꼬레가 한국인가 생각하고 잠시 설렜는데, 화이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거리로 나가서 펼쳐진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안끼엠 호수를 둘러싼 큰 도로가 있는데, 거기를 오토바이 타고 베트남 국기를 든 사람들이 정말 끝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저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저도 여기에서 30분쯤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2002년의 우리와는 조금 달랐던 것이, 같이 있으면서도 개인으로서 다들 즐기고 있더라고요. 우선 다들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니까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어깨동무하고 응원을 하거나 하는 것도 거의 없었고, "대~한민국" 같은 보편적인 4박자 구호가 없으니까, "베트남(비엣남)"하고 산발적으로만 외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2002년에는 응원가도 구호도 어디선가 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의 몸을 감각하며 놀았기 때문에 더욱 즐겁지 않았나 싶어요. "오토바이에서 내리면 다들 더 재밌을 겁니다."하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문화의 차이겠죠.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와서 자고, 다음 날 아침을 먹으러 나오니까 베트남 직원이 "콩그레츄레이션! 코레아 윈!"하고 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고, 저는 "베트남 윈! 위 미트 넥스트 스테이지!"하고 서로 웃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영어를 하고 나니 좀 혼미해졌습니다...
오늘은 베트남과 한국의 4강전이 있네요. 어디를 응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가 월드컵 4강에 나갔던 것처럼 그런 기쁨을 전국민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박항서 감독님이 그것을 이끌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는데요. 우리흥 군대 면제도 꼭 받으면 좋겠고, 그렇습니다. 우즈벡전 페널티킥 때 차마 못 보고 서 있다가 골 넣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는 가지 마라 군대..."하는 심정이 되더라고요.
제가 4강전이 끝나고 살아 있다면 그 후기도 올리겠습니다.
* 아, 그리고 요즘 언론에서 "베트남에 온 한국인들은 밥도 얻어 먹고 술도 얻어 먹는다."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고 쓰고 있던데, 제가 느끼는 하노이 현지 분위기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저는 박항서의 나라에서 왔습니다!"하고 밝힐 맥락도 전혀 없고요, 누가 물어서 아임 프롬 코레아! 라고 해도, "아, 그렇군요."하는 정도가 전부네요. 물론 제가 오징어라서 그렇고 남들은 밥도 술도 다 얻어 먹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ㅠㅠ
* 숙소 앞에서 60분 마사지가 20만동 (한국 돈으로 9천원...) 이라고 해서, 저는 인생 첫 마사지를 받으러 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