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 여성입니다.
지방국립 사범대에 다니고 있고 휴학을 해서 삼 학년이에요.
제 마음이 정말정말 혼란스러운데, 부모님을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기는커녕 최근 들어 깊게 교류하는 친구마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에 글을 씁니다. 때때로 제 번민이나 우울을 털어놓기에는 주변인들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치열한 세상 속 다들 자기 일에 바쁠 텐데, 이런 길고 복잡한 문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실은 아무에게도 이런 얘기를 하지 못해서 서툴기 때문이기도 해요.
초등학교 삼 학년 때부터 우울증이 심했어요.
우울증이 심하면 기억력과 문장력이 약화되고, 과거가 하루하루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초등학교 삼 학년 때부터 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어요. 짧게 짧게 이어지는 기억의 조각을 겨우 묶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장 이번 겨울 방학 때 일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조금 이해가 되실까요? 언제나 스스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나 겨우 일상 속 과제들을 수행하고, 저에 대한 심층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체력과 정신력이 방전되어 잠에 들기 마련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고, 죽는 걸 고려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하던데 저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어릴 때부터 죽지 못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인생에 있어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부모님이 제게 너무 욕심이 없어 보인다,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거냐, 하고 물으시면 그냥 회피해버렸어요. 저는 그냥 제가 당장 죽었으면 하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요. 죽는 것만이 제 욕심이었고 미래의 제가 마주하리라 생각하는 사건 중의 하나였어요. 어릴 때 억지로라도 인생 계획을 하고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가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죽거나 자해를 하는 상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좀 더 어릴 때 깨닫지 못했던 걸 마음 속 깊이 후회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제 마음이 너무 우울할 거라 생각하니 그냥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최선이구나 해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제 어린 시절을 너무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무튼, 자연스럽게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고 제 내신 성적은 완전 최악이에요. 그러다가 고3 때 좀 정신을 차려서 정시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대해서 선택해야 할 때가 왔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어린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취미가 있었는데 바로 책 읽기예요. 어릴 때부터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문학 작품을 읽거나 비문학으로 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때, 또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연출과 스토리에 대해 고민할 때만이 제가 살아있는 거 같다는 기분을 느꼈어요. 오직 글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저는 제가 내면에 숨겨 왔던 이야기들을 드러내는 직업만이 제가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작가나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었고 실기 준비를 같이 해서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그걸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죠. 부모님께 그걸 말씀드리자마자 온 친척에게 전화가 와서, 또 저를 대면하고서 저를 말리기 시작하는데... 저는 아직도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친척들과 만나는 게 싫어요. 만나는 게 싫다고 표출할 순 없지만 정말 많은 폭언들을 들었거든요. 그때가 고1이었고 고2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고3 때 정신 차려서 15311 등급이나마 받게 됐어요. 지방에 사는 사람이 좋은 대학교에 진학할 만한 수준은 아니죠. 그래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유로 지방국립 사범대에 진학하게 됐어요.
처음으로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는데,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제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활을 하기엔 약간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의 제 삶을 좌우해 오시던 부모님과 떨어져, 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이 늘어나니까 점차 삶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제게는 너무 새로운 일이었어요. 매일매일 죽을 궁리만 하던 제가 어느 날 밤 자기 전에 내일 이러저러할 생각이 너무 기대된다, 하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걸 깨닫고 나서 펑펑 운다는 건 제가 '감히' 기대할 만한 일이 아니었거든요. 이 문장을 쓰면서 우는 지금도 그때의 기쁨과 환희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저는 그때 제가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경험을 한다고 해서 삶이 급작스럽게 행복한 방향으로 치닫거나 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확실한 건, 제가 저 스스로를 '언젠가 죽을 사람'에서 '앞으로 살아갈 사람'이라고 정의하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으로 가졌던 욕심은 다시 문예창작에 대한 꿈을 키우는 거였죠. 용돈을 모아서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책을 사고 공모전을 찾아봤어요. 무기력증 때문에 작품을 제출하거나 한 적은 없지만 매우 행복했어요. 우리나라는 정신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잖아요. 병원에 가면 낙인이 찍힐 거라고, 저 스스로 고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버렸어요. 부모님께 알릴 수도 없었고요. 부모님은 제 많은 부분을 모르시거든요. 제게 우울증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시죠.
그러다가 스물두 살이 됐고,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로 공황장애·불안장애를 앓게 됐어요. 저는 나름대로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이 때문에 학교를 나갈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한 과목에서 F를 맞았어요.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살렸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좀 아쉬워요. 일반휴학 시기가 지난 뒤에 발병해서 학점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어요. 장애로 인한 제 신체적 증상이 심각해서 저는 처음엔 심장 관련 문제인 줄 알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제게 정신과 진료를 추천했고 그때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 한 달은 약을 먹지 않으면 침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었던 기억이 나요. 어찌어찌 학기를 마치고 나서 저는 본가에서 충분히 쉬어야 했어요. 그러나 종강 내내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이어졌고, 그 때문인지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서 한 학기 휴학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이제 저예요. 다행스럽게도 장애가 많이 나아져서 저는 복학했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요. 예상하셨겠다시피, 복학을 해서인지 저는 삶에 대한 욕망을 되살린 상태고 자해나 자살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청소년기만큼 심각하지는 않아요.
스물세 살이 되었고 저는 삼 학년이지만 다른 친구들은 사 학년이에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을 시기잖아요. 저는 사범대생이고요. 여전히 죽고 싶은 마음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살고 싶으니 진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거든요.
일단 첫 번째 큰 고민은 임용고시를 치느냐, 교육행정을 선택하느냐예요. 어느 한쪽의 길을 선택하면 공부야 제 몫이니 상관은 없는데 과연 뭐가 제게 더 맞을지 모르겠어요. 우선 저는 교사로서의 소명의식도 가지고 있고 누군가를 가르치기 좋아하며, 청소년기에 고통받을 아이들을 도와주고도 싶고, 강의 구성 능력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제 체력으로 교사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정확히 말하면 교사로서의 인생을 제가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부족해요. 해서 나쁠 건 없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꽤나 성공한 인생이 되겠지만 일단 저는 교사가 좋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지 원하지는 않아요. 교육행정을 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고, 부모님도 교사보다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인정해 주실 거예요. 교사가 힘들어 보인다면 교육행정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고요. 이 두 가지 선택에 공통적인 단점이 있는데 바로 지방에서의 삶을 계획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러면 졸업 후에 부모님과 함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저는 그걸 별로 바라지 않아요. 제게는 결혼 계획이 없어서 더 걱정이 돼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도 작가나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학벌도 능력도 부족하지 않나 싶어서요. 더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수능을 다시 쳐서 관련 과에 진학한다는 미친 생각도 해 봤어요. 서울을 목표로 해서요. 그러면 부모님과 더 멀리 떨어질 수 있고 제가 처음으로 욕망하던 삶을 살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벌써 스물세 살인데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러워요. 이 세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제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이 듣고 싶은데 주변인에게는 말을 꺼내지 못하겠어요. 그렇지만 무언가가 결정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할 거라는 마음가짐은 충분히 잡혀 있는 상태예요.
두 번째 고민은 제 정신적 문제와 관련된 거예요. 저는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제 우울증과 무기력증, 그리고 아직 완치되지는 않은 불안공황장애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데, 지방에 거주하는 터라 좋은 상담센터를 찾기가 힘들어요. 현재 약을 받는 정신과도 나쁘지는 않지만 저는 정확한 진단을 받고 싶어요. 정신과에서는 병증을 우선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상담을 신청하기가 힘들어요. 지역은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제가 상담할 수 있고, 테스트 받을 수 있는 센터를 추천해 주시면 좋겠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 글을 읽고서 이 두 가지 고민 중 한 가지라도 답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어떤 답변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요. 바쁜 삶 속에서 누군가가 제게 관심을 가지고 조언한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관련 문제를 겪었거나 앓고 계시는 분이 답변 대신 말을 걸어 주셔도 행복할 거 같네요. 한두 시간을 소모해 글을 썼고, 지금 너무 홀가분해요. 이렇게 인생을 정리해 보는 것 자체가 제게 도움이 됐어요, 전부를 서술하지는 않았지만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요약
1. 교사 vs 교육행정공무원 중 어떤 걸 선택해야 할까요? 스물세 살에 수능을 다시 친다는 건 좀 웃긴 일일까요?
2. 어렸을 때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좋은 정신상담센터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상담과 테스트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은 후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역이 어디든 괜찮아요. 저는 지방에 살기 때문에 주변에 좋은 상담센터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