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하나쯤 어린시절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도 다른 누군가처럼 그런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나를 아직도 지탱시켜주고 있다.
나는 2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가족관계를 소개하면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이야~ 이쁨받고 자랐겠네" 라든지, "누나들한테 사랑 많이 받고 자랐네"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렇게 예상하는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가족관계에는 약간 변수가 있다.
막내 아들이긴 하지만
쌍둥이 동생일 뿐이지 나이 차이가 있는 형이 없다라는게 그 변수이다.
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아 부모님이 아들 낳을려고 고생하셨네"
그러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네" 라고 대답한다.
쓴웃음을 짓는 이유는
형이나 다른 누나들처럼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낳은 아들인데 나이 서른이 넘도록 제대로 돈을 벌어본적도
제 앞가림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버겁기만 하다.
막내아들이라 사랑이랑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이러한 질문에도 늘 제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왜냐?
부모님의 관심이나 사랑, 누나들의 관심 같은것은 전부다 형에게 뺐겼기 때문이다.
형이 나보다 잘나거나 더 착하거나 그래서 관심을 다 가져간게 아니라
형이 어렸을때 부터 몸이 약했어서 그 관심을 다 가져갔었다.
형은 내내 대학병원에서 "다시는 걸을 수 없습니다", "다시는 들을(귀)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수술만 50회 가량 할 정도로 허약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사담이지만 우리 형은 군대도 현역으로 다녀왔고 지금 잘 듣고, 잘 걷고 다닌다
우리 어머니만 xx대학 병원에 치를 떨뿐
다시 얘기로 돌아와
형이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기억이 나를 아직도 지탱해 주고 있다.
그때 형과 내가 8살이었다.
형은 내 지식이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탈장이라는 증세 때문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서울대 병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형이 그런 병원에 입원을 했다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겨우 여덟살이고 한창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할 때 였다.
2주나 형 병수발 하느라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어머니가 그리울 나이였고
내가 받을 사랑을 뺐어가는 형이 미울 나이였다.
언제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나를 반겨주거나 챙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여덟살 짜리가 밥 챙겨 먹는게 쉽나?
내 얼굴이 점차 꼬질꼬질해지고
어머니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져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졌을 때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지다
집에서 찾아낸 동전 700원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금액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동전을 들고 형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 병원까지 찾아가기로 했다.
우선 제일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걸었을 길을 검색해보니 성인 걸음으로 30분이 걸리는 거리다.
그 길을 여덟살이 걸어 갔을 생각을 하니 지금도 스스로가 안쓰럽다
겨우겨우 역에 도착해서
역무원에게 "서울대 병원 가고 싶은데 무슨 역에 있어요?" 라고 물어보니
혜화역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교육 대단하다. 여덟살이 누구한테 물어보면 길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지 알다니
700원으로 혜화역 가는 지하철 표를 끊고
지하철에 탔다.
이전에 어머니 따라 타본 경험이 꽤 있기에 가능한 일이였던거 같다.
지하철에 타서 내가 제일 무서워 했던 일은
자다가 내릴 역을 놓치는 거였다.
그래서 정신을 또렷하게 차릴려고 노력을 했다.
4호선 끝자락에 살던 나는 혜화역까지의 거리도 모른채
혜화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올때까지 정신을 차릴려고 애를 썼다.
절반쯤 갔을까
옆자리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께서 말을 거셨다.
꼬맹이 한 명이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신기해서 말을 거셨던거 같다.
"애기야 어디가니?"
"형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찾아가고 있어요"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건너편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랑 나에게 말을 건 아주머니랑 동시에 우셨다.
그리고 아주머니께서는 혜화역 도착하면 깨워줄테니까
아주머니 무릎을 베고 좀 자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나 건너편 할아버지가 왜 우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며
나는 잠에 들었다.
한참을 잤을까 아주머니께서 전 정거장에서 깨워주셨다.
다음 정거장에 서울대 병원이 있으니까 잘 찾아가고 무슨 일이 생기면 쓰라고 5000원을 쥐어 주셨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훔치셨다.
5000원이 얼마나 거금인지 아는 나는 감사해 하고 혜화역에서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도 감사하신 분이셨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나는 거기서 부터 일사천리였던거 같다.
서울대 병원 찾아가는 길목마다 친절하게 다 방향지시표와 서울대 병원가는 길이라고 적혀있었으니까.
1층 안내데스크에 도착해서 우리 형 이름을 대니까 몇호실에 입원 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내가 형이 입원한 병실에 들어서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어머니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 쪼그만 꼬마애가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혼자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