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
삼십. 흔히 하는 말로 '꺾어진 육십' 내 나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제적학생' 이것은 사실 그 자체다. 나는 대학에 두 번 입학해서 두 번 다 제적당했다. 성적증명서를 떼보면 2학년까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은 나를 '민주투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형사와 검사, TV 아나운서와 정부당국의 '나으리들'은 나를 일컬어 '좌경용공분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사람들이 자기 주관에 따라 붙여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자리 없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실업자라고 나를 비난한다. 그렇다. 나는 직장이 없다. 하지만 직업은 있다. 나는 힘으로 벌어먹고 산다. 번역을 하거나 수필을 쓰고, 어떤 때는 드라마 대본이나 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의 직업을 구태여 말하자면 '자유기고가'라 할 수 있다.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도 하나 있다. 나는 실업자가 아니다.
나는 감옥에 두 번 갔다 온 전과자이지만 예비역 육군 병장이기도 하다. 폭력전과가 있지만 그렇다고 폭력배는 아니다. 한번도 남을 때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계엄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 때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군대생활 32개월 동안에도 영창 한번 간 일이 없는 모범 사병이었다.
나는 별로 잘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아니다. 보증금 1백만 원에 월세 5만원짜리 자취방이 내 보금자리이고 저금통장이나 처자식은 아직 없다. 나는 가난한 노총각이다. 혼자된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드리지도 못하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이다.
나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동안에는 돈벌이를 안 한다. 그러나 건달은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미래가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내가 원하는 미래란 별 것이 아니다. 열심히 노동하는 삶들이 천대받지 아니하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회, 평생을 눈물과 비탄 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있는 나라, 강대국에 매이지 않고 우리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나라. 이런 사회, 이런 나라가 바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미래인 것이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부귀영화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미워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붙여서든 감옥에 잡아 가두려고 한다. 계엄령 위반이니 폭력죄니 하는 내 전과는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 별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6월에 수백만 국민이 했던 일들에서 보듯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매일 매일 하고 있는 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내가 나를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 이렇게 살려는 뜻을 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나름대로의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이런 생활에서 찾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나가 복잡하고 독특한 존재이듯이 나도 또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단지, 지난 십 수 년간이 사회가 나와 이웃에게 가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내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생활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출세욕을 품게 한 '가난뱅이 의식'
나는 2남 4녀 중의 차남이자 다섯째이다. 태어나서 10년은 경주에서, 고교 졸업까지 10년은 대구에서 자랐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82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그 분은 비록 "가슴에 달 금빛 훈장도 타고 갈 황금 마차도 없는" 평교사로 일생을 마쳤지만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먹였고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다.
나는 '가난뱅이'였던 적이 없다. 밥이 없어서 굶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소년시절 나는 주관적으로 가난을 몹시 심각하게 경험했다.
다른 친구의 것보다 빈약한 도시락 반찬은 점심시간마다 나를 괴롭혔다. 미술시간이면 두꺼운 스케치북과 포스터칼라를 꺼내놓은 친구들이 낱장 켄트지를 꺼내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뒤꿈치를 꿰맨 양말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고 외풍 센 먼지투성이 우리 집은 나로 하여금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내 소년기의 대부분을 어두움으로 뒤덮었다. 대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두 살 간격으로 늘어선 6남매. 내가 중 3일 때 큰 누님과 형은 더구나 사립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한 가계였다. 빚이 늘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집에 달린 점포에 잡화상을 차렸다. 매일 새벽 시내의 큰 시장에 나가서 생선과 야채를 받아오는 중노동 때문에 심장이 약한 어머니는 늘 어딘가 편찮았다. 나는 어머니가 이고 오는 짐의 무게를 헤아리고 그 헌신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가난과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한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에 화가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를 보고서 모른 척 지나간 적도 있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그 뒤 며칠 동안 몹시 번민하고 자학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가난의 이유를 몰랐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왜 시장아줌마가 되어야 했는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새 빚 걱정에 한숨을 쉬다가 얼마 후 아버지가 대구에서 경주로 학교를 옮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이 확실할 분이었다.
나는 법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었다.
한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가끔 보건소에 가서 무료로 주는 알약을 타오곤 했다. 어머니가 그 알약을 한 움큼씩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일이었다. 경주에서 토요일이면 오던 아버지가 가끔 일직 때문에 못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면 나는 밑반찬을 가지고 경주에 갔다. 아들에게 더운 밥을 먹이려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의문을 품었다. "하숙 대신 자취를 해서 도대체 얼마나 절약될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 우는 적이 많았다.
그 때 눈물을 훔치면서 나는 결심을 굳혔다. "하루빨리 법관이 되어야지"
나는 누가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판사'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사회정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는 바로, 가장 빨리 출세해서 부모님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장한 각오로 '판사'라고 대답하면 백부님이나 당숙들은 매우 기꺼워하였다. 하지만 내 부모님께서 그런 대답을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누이들이 은근히 그런 결심을 부추겼을 분이다. 나는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하기 위해 '판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은 내 삶에서 처음으로 자각한 사회적 욕구였다.
사회적 부조리의 첫경험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한 것 같다. 자유니 정의니 하는 빛나는 단어들을 책에서 배웠지만 나는 한번도 그 단어들 때문에 가슴 설레거나 잠 못 이룬 적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는.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이제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저 신기하게 들릴 뿐이었다. 곧이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출범했지만, 그것 역시 다음해 국민윤리 교과서에 장황하게 서술된 '한국적 민주주의' 만큼이나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이철씨가 간첩으로 나오는 반공드라마를 들으면서도 나는 일간신문에 기둥 만한 활자로 박혀 나오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학생회장 선거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란 것이 생겼지만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동아일보를 구독하던 우리 집에 아침마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정치권력의 언론자유 탄압에 비분강개하지는 않았다. 그건 드물게 재미있는 정치적 사건에 불과했다. 정치경제 교과서에 국민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설명한 내용과 유신헌법 조문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었지만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것을 몽땅 외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잡혀간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아무도 긴급조치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75년 당시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하여 김상진이라는 서울대학생이 할복자결한 일까지 있었지만 내가 긴급조치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등생'이었다. 중학교 때보다는 성적이 훨씬 향상되어 선생님들로부터 일류대학에 진학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수한 고교평준화 1기생'이었던 것이다. 교실 구석에서 박정희와 모모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 속살거리거나,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에 대한 질문을 해서 사회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친구들을 나는 경멸했다.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또 학생이라면 학교공부나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회라는 것'에 대해, 특히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상황이 나에게 닥쳐왔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처럼 닥쳐왔다.
나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 받은 봉급을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 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 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 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 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어머니가 장사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 준 아버지,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 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 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 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오도된 반란 : 냉소주의
아버지의 봉급액수를 알게 된 순간 이후, 나는 교과서와 선생님들의 '지당하신 말씀'들 속에서 거짓의 냄새를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하기만 하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적 조화가 이루어진다" 사회교과서 전체를 지배한 이런 조화론적 세계관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각자가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계일 뿐이었다.
그것을 사회적 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뿐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느낀 가난에 대해 부모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 근면하고 정직하며 힘껏 일하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부모님이 오히려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장래의 희망을 법관으로 잡은 데 대한 회의가 싹텄다. 유신시대의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타락해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법관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어느 정도 권력에 가까이 있고 잘만 하면 한 재산 모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러워할 뿐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나쁜 직업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학교생활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중고등학생 3천 명이 ㄱ자 4층 하나에 몽땅 수용된 학교. 도서실 좌석이 1백 석 남짓하고 그저 교사와 학생들을 족쳐서 명문대학에 많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학교운영. 교사의 평균연령이 30세를 겨우 넘고, 서울의 강남지역에 여학교를 짓느라고 정신이 팔려 어두운 교실에 형광들을 더 달아달라는 소박한 요구마저 묵살하는 재단 측의 횡포.
대부분의 학교에서 그러하듯 학생들의 인격 함양에 신경을 쓰기엔 선생님들에게 여유가 너무 없었고, 오직 명문대학 진학에만 눈이 팔린 우등생을 만족시키기엔 젊은 선생님들의 경륜이 부족했다.
나는 학교에 대해 아무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엔 아무 책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꺼내놓고 혼자 공부하거나 잠을 잤다. 방학중의 보충수업에는 한시간도 참석하지 않았고 예비고사가 끝난 후 두 달간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성이 비뚤어진 우등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비뚤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친구들이 과목당 몇 만원씩 내고 학원강사들에게 그룹지도를 받는 시간에 나는 어머니 대신 가게에 앉아 영어 참고서를 읽어야 했고,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수학 때문에 고민하다가 최후수단으로 수학정석과 해법수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버려야 했다.
나는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는 척척 풀 수 있게 되었다. 다 아는 문제를 푸는 선생님의 강의를 꼬박꼬박 듣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비뚤어진 우등생 쪽으로 끊임없이 몰아댔다.
나의 그런 행동이 선생님들에게 얼마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무릎 꿇고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나의 정신세계도 실로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쳤다.
각박한 입시교육이 쳇바퀴 속에서 선생님도 나도 혹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법관이 된다는 데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흥미나 적성으로 보자면 역사학과 언어학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그건 별로 돈벌이가 안되는 직업인 것 같았다. 가난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루 빨리 그것을 벗어나려면 법관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지만 선생님도 한숨만 내쉴 뿐 이래라 저래라 권유하지 않았다. 나는 괴로웠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열쇠를 찾아낸 후 고민을 덮어버렸다. 그 열쇠는 바로 냉소주의였다.
세상은 어차피 불합리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다. 꼭 논리적으로 타당한 행동만 할 수는 없다. 불합리해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보라!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지 않은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뒤로는 개수작해서 돈 벌어도 남 보기에 정승같이 쓰면 칭찬 받는다. 졸업식날까지는 술 담배 하면 안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그때부턴 제 마음대로 아닌가? 마음 내키는 대로 공부해도 합격하면 영웅대접 받지만, 선생님 말씀 꼬박꼬박 듣고 예습 복습 철저히 하고서 떨어지면 병신 소리 듣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 세상에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란 없는 거야.
정 역사학이 하고 싶으면 법관 하면서도 할 수 있을 꺼야.
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습이나 규범을 진리 혹은 가치와 혼동했다. 겨우 열 아홉 살 촌뜨기 주제에 마치 인생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늙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기야 고등학교 3년 동안 단 한 권의 교양서적도 읽지 않고 교과서 참고서만 팠으니 사고의 폭이란 것이 벼룩의 간만큼 밖에 안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원서를 썼다. 법대와 경영대, 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몽땅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법대를 지망한 나는 사회계열에 원서를 낸 것이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예 말씀이 없었고 아버지는 내가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였다.
영어과를 가서 영어를 능통하게 쓸 수있게 된 후 다시 서양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동양 사람은 서양을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만해서 동양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동양이란 고작 인도와 일본뿐이다. 그러고서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린다. 따라서 동서양 철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동양인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우선 서양어와 서양철학을 전공한 후 다시 동양철학을 연구해서 훌륭한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어보란 것이 아버지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아버님, 그 많은 공부할 동안 제 학비는 누가 댑니까? 돈은 언제 벌어 부모님 편안히 모시구요? 아버님은 자식들의 생각을 너무 모르십니다. 왜 자식 덕에 노후에 편안히 사실 생각은 안하십니까? 아버진 너무 이상주의자세요. 현실은 냉혹하지 않습니까? 전 별로 판사 되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판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서 다음날 학교에 나가 원서를 쓰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무엇인가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며 가슴 설레야 할 그 열 아홉의 나이에 나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는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고, 화랑 관창과 김유신의 생애를 들었으며, 어버지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의 불합리성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지당하신 말씀'에 대한 정신적 반란의 싹을 틔웠다.
하지만 내 정신의 텃밭이 너무나 황폐하고, 입시공부라는 환경이 너무나 메말랐던 탓으로 그 저항의 싹에서 돋아난 것은 자유와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냉소의 가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내 대학 신입생 1년간은 사실상 고등학교 4학년의 의미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학생활의 첫해 : 실망과 환멸의 시기
나는 숨쉴 틈도 없이 빡빡한 입시공부의 지옥에서 그야말로 "시간이 지천으로 남아도는 대학생활" 속으로 내던져졌다. 남들처럼 나도 대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입시지옥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은 지성을 가둬놓는 하나의 정신적인 감옥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귀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은 중년의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서 나는 대학이 풍기는 감옥의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학문은 현실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보면 사회적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학문인가 아니면 부조리와의 싸움인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부조리와의 싸움이라고 하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웠고, 그게 무서워 학문 쪽을 택하려니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해서는 왜 안될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쉽게 말해서 데모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 그 말이야!"
좀 짜증 섞인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도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대학에 다녀보지를 않아서요. 앞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지금 제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면 그저 학문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호통과 훈계를 듣고 나서 나는 면접시험장을 나왔다. 같이 입학하는 친구들이 큰일났다며 걱정을 해 주었다. 나도 좀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실망이 그보다 훨씬 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질문을 한단 말인가? 대학생이면 성인이고 독립된 인격체인데, 데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나 토론은 몰라도 하겠냐 말겠냐를 그렇게 다그치다니. 지성인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날의 실망과 회의는 다가올 숱한 환멸의 날들에 대한 하나의 암시오, 예고였다.
인간과 사회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그 숱한 의문들에 대해 대학은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았으며 교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캠퍼스 잔디밭에서든 단지 몇 명이 모여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배우는 모든 이론들이 난해하고 심오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것과는 별개였다.
경제학개론 강의는 미적분 강의의 연장선이었다. 제한된 액수와 화폐를 가진 소비자가 그 돈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소비지출을 하는가. 일정액의 자본을 가진 생산자가 일정한 물가와 임금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장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떻게 자본과 노동을 결합하는가? 경제학 교수는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갖가지 방정식과 기하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날 때부터 가난한가? 어째서 아무런 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평생 어마어마한 소비를 하며 호의호식하는데 하루 10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다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은 과학이 아니라 규범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인 경제학이 다룰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내게는 경제학이 매우 신비롭기는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게 느껴졌다. 국가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이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주의주장을 다루었지만, 정치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부를 비판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서 몇 년 씩 징역을 살리게 하는 긴급조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긴급조치 위반인 이상한 현실. 그것을 연구하는 것,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마저도 엄격히 금지된 우리나라의 국시가 자유민주주의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정치학 강의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철학개론 교수는 칸트의 '위대한' 사상에 대해 가르쳤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1978년 대한민국 청년학도가 칸트를 연구해야 하는지, 칸트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빛과 희망을 주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른 이론들은 '난삽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재미없는' 것이었다.
대학의 강의는 고등학교의 강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골라잡기와 단답형 주관식 문제를 풀기 위해 단어와 문장을 암기해야 했지만, 대학에서는 논문식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교수님의 강의와 교과서의 핵심적인 대목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몽땅 암기해야 했다. 차이는 그런 정도였다.
하나의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은 거의 없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지닌 교과서로 한 학기 내내 수업을 했다. 지금,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고뇌하고 있는 '우리들이 문제'는 모든 강의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룬 주장은 이미 학문이나 과학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라면 메모 한 장 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지되었다. 교정 곳곳에서 사복형사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학생들을 감시했고, 기숙사에서 내려오는 언덕배기에는 사시사철 무장전경을 태운 닭장차가 주둔해 있었다. 데모를 한다든가 이념서클에 들면 틀림없이 처벌을 당한다는 '무서운 소문'들이 신입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흘러다녔다.
유신시대의 대학에는 자유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학점을 잘 따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빈부격차의 원인을 연구하며, 남북통일의 방도에 대해 토론하고, 왜 술 먹고 연애 하고 학점 따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되는가를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단 한 뼘의 자유조차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새로운 형태의, 입시공부와는 다른 성격의 사회적 억압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햇다. 대학 진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학 진학은 '법관'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공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유학, 대학생활이라는 신천지에서 나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법관이란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법관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타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위해 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의 싸움 가운데 몸을 던질 것인가? 나는 대학에서 이같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선택, 성인으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인간으로서는 처음 직면하는 이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학생활의 첫해를 다 바쳐야 했다.
절망적인 선택 : 달걀로 바위치기
나는 매우 냉소적인 신입생이었다.
흔히 이념서클이라 일컬어지는 학회(學會)에 가입하여 역사와 철학, 노동문제와 농업문제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 원인에 대해 눈뜨게 되고 박정희 유신정권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지만 나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판사가 되려면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결국 나는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 자체에 대한 냉소 외에는 달리 행동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유신독재는 철옹성 같아 보였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고, 그가 죽으면 후계자가 또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것이다. 그러나 몇백 명이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해본들 신문에 한 줄 보도되지도 않고 지나간다. 돌멩이와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혁명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싸워도 유신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더욱 냉소주의를 부추겼다.
학교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지만 학회에서 하는 공부는 매우 흥미로왔다. 매스컴에서는 '지하대학'이라는 이상스런 명칭을 붙여주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모여 일고 책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이 끝난 후 봉천동의 후미진 막걸리집에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래 불렀다. 매월 한 번씩은 야외로 나가 논문 발표와 토론을 했다.
여름과 겨울의 방학에는 열흘씩 농촌 활동을 했다. 입시를 위한 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폭 넒은 이해, 논리적인 사고와 발표력 등 지성인의 기본 소양을 쌓은 것은 현대식 건물과 눈부시게 푸른 잔디밭이 있는 관악 캠퍼스가 아니라 음습한 선배의 자취방과 봉천동의 쓰러져가는 막걸리집에서였다.
그러나 독서와 토론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여하튼 행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1학기 여름방학에 구로공단의 한 야학선생이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1년 반의 야학활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리면 16세, 많아야 23세 사이의 여성 노동자들. 대개 전라도에서 호남선·전라선 야간열차로 상경하여 공단으로 흘러 들어온 농민의 딸들. 그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일해서 한 달에 2만 5천 원 남짓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 원, 하숙비가 보통 3만 5천 원, 내가 살던 학교 기숙사의 한 달 식비가 2만 1천 원, 하루 두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고등학생에게 영어·수학을 가르치는 대가로 내가 매월 6만 원을 벌 때 그들은 매주 60시간 이상 노동해서 2만 5천 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으로 먹고 입고 방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 부모님의 약값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고 살았다.
한 달 용돈을 5백 원밖에 쓰지 않는 또순이도 있었다. 국민학교를 중퇴하거나 겨우 졸업한 그들에게 국민학교 산수를 가르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밥을 굶은 적도, 내 힘으로 벌어먹어야 했던 일도, 셋방살이 설움을 겪은 일도 없는 내가 스스로 가난이 싫어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다니 나는 얼마나 사치스런 인간인가? 1백 원짜리 크림빵 하나에도 어김없이 들어 있는 세금을 이들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국가의 녹이라는 형식으로 그 세금을 얻어서 살아가는 직업을 단지 내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목표로 삼다니, 나는 얼마나 염치없는 자인가?
가난에 대한 나의 강박관념이 사실은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너무나 편한' 기숙사를 나와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네 번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세워졌고 단지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친 대가로 한없이 높아만 보이는 교도소 담벼락 안에서 그 싱싱한 젊음을 바쳐야 했다. 검은 법복으로 몸을 감싸고 높이 좌정한 판사들은 그들 순결한 젊음 위에 죄인의 너울을 뒤집어 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년 대학입시 수석합격자의 소감을 들어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본 판사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들을 짓밟는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이 유신체제 하에서 판사가 될 경우, 만인 후배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기 저 판사처럼 조금도 주저없이 징역 3년 4년을 선고해야 할까? 아니면 무죄를 선고하고 쫓겨나야 할까? 쫓겨나려면 애초에 무엇하러 판사가 된다는 말인가?
겨울방학 내내 나는 고민했다.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 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 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학과 선택을 결정하는 날,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오후 2시까지 온통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법대를 썼다가 지워버리고 경제학과를 써넣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한 것이 나은 길이라 생각했다.
경제학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취업이 순조롭기 때문에 집에다 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그날, 5년간이나 간직했던 법관의 꿈을 털어버리면서 나는 그만큼의 세월 동안 나의 생활을 지배했던 냉소주의와 결별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나오며 나는 가슴이 후련해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시에는 학교 안에서 닭싸움을 하거나 유행가를 크게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경찰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는 학습의 골방을 벗어나 행동의 광장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가슴속의 먹구름이 말짱하게 걷히지는 않았다.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의와 투쟁하지 않고서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사회에서, 그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정치적 행동은 하나의 도덕적 결단이요 절망적인 몸부림일 수 밖에 없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야학과 농촌활동, 학회활동과 학과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시위대의 선봉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강의실 복도의 소화전을 열어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저 흉악한 유신체제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공포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슴 깊이 확신하지 못한 가운데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 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 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 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 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 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 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 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 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 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 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 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 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 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 달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 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지역 민주노조 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 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 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 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 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 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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