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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이를 알게 된 건 ‘마비노기’라는 게임에서였다.
숲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는데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나길래 가보니, 그녀의 캐릭터가 곰에게 후려 맞아 죽어 있었다.
한 방에 곰을 날려버리고 쿨하게 부활시켜주며
“여긴 곰이 많으니까 저 위쪽에서 사냥하세요.”라는데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다시 다른 곰에게 달려들었고 당연하게도 한 방에 죽어나자빠졌다.
계속되는 무모한 돌격 끝에 이십 개도 넘게 있던 부활의 깃이 다 떨어지자 내 말 뒤에 그녀를 태워 가까운 마을로 달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곰새끼들.... 킬.... 곰....”
뭔가 어법에 맞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고집과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고,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처음으로 오줌이 마려운 듯 저 뱃속 깊은 곳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너무 쉬운 사냥터였고 경험치도 받을 수 없었지만 그 날부터 그녀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워낙 게임에 소질이 없어 적을 죽이는 횟수보다 자기가 죽는 횟수가 많은 그녀였지만 몇 시간이고 그렇게 사냥을 하다 털썩 주저앉아서는 “아... 힘들어 죽겠네” 한마디 던질 때면 뭔지 모를 뿌듯함과 보람이 가슴 꽉 차오르곤 했다.
최소한 그녀는 저 현실의 여자들과는 달리 하루에 한 마디나마 내게 말을 건네줬기 때문이다.
3개월이 지날 무렵 어두컴컴한 던전에서 갑자기 우뚝 선 그녀가 내게 말했다.
“핸드폰 있어?”
너무나 갑작스런 질문에 떨려 몇 번이나 잘못 쓴 숫자를 고쳐가며 전화번호를 보냈고, 그렇게 우리는 던전에 캐릭터들을 세워놓은 채 꽤나 길었던 첫 통화를 시작했다.
게임에서와는 달리 그녀는 꽤나 수다스러웠고 참 아는 것도 많았다.
할 말이 없어 계속 맞장구만 치고 있는 내게 “넌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구나?”라며
자기는 과묵하고 남자다운 사람이 좋다고 했다.
사실 여자와 통화해본 적이 없어 그랬다는 말은 영원히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갔다.
며칠을 조르고 졸라 그녀의 사진을 전해 받았다.
그 조그마한 핸드폰 액정을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현실세계에선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미녀가 새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액정이 꺼지자 검은 화면에 반쯤 비친 내 추한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우리가 만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말 스스로 미친 거라고 수십 번 되뇌며 덥석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여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런 전개에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며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이제 벌어질 사태와 비극적으로 끝날 미래를 확신하며 마실 줄도 모르는 소주병을 붙잡은 채 밤새 울었던 것 같다.
결국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명훈아 부탁이 있는데....”
초등학교부터 다섯 번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나와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걸은 명훈이는 180이 넘는 키에 누가 보아도 흐뭇해질 외모를 갖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이 현실을 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고 내 비참한 외모로 그녀에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기기보다는 한 번의 거짓으로 영원히 그녀에게 좋은 남자로 남고 싶었다.
“야 진짜 그냥 밥만 먹고 오면 되지?”
“응 게임 이야기 꺼내면 그냥 웃으면서 넘기고 그냥.. 잘해줘...”
“알았어 임마. 모르는 얘기 나오면 문자할게”
홍대입구역 모퉁이에 숨어 그들의 만남을 훔쳐보았다.
원래 한 몸이던 천사가 두 개의 몸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 재회한 듯 그 둘은 너무도 조화로웠고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입가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에서는 뜨거움이 왈칵 솟아나온다.
울면서, 웃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쑤셔오는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밥만 먹겠다던 그들은 어느새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명훈이는 걱정 말라는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멀리서 하얗게 웃는 그녀를 보며 정말 잘한 거라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느덧 밤이 깊었고 약간은 비틀거리던 그들은 칵테일 바로 들어갔다.
명훈이는 한 시간이나 지나서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야 씨발 형님이 오늘 너 아다 떼준다! 알았지? 형 믿어 임마! 알았지?!”
녀석은 내가 아직 여자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은정이에 대한 나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여자경험이 많은 녀석에겐 술김에 솟아난 배려였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녀석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화장실 갔던 은정이가 오고 있다며 전화를 끊어버렸고, 당장 저 미친 새끼를 끌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변에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야 다됐어 내가 길 건너 모텔 데리고 들어갈 테니까 문자로 방번호 보내면 들어와 알았지?)
목이 뻣뻣하게 아파올 때까지 문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온갖 상상이 뇌리를 스쳐 지났고, 맨 마지막으로 옛날 파리넬리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성기능 없는 동생이 여자를 꼬셔 다 벗겨놓으면 몰래 쌍둥이 형이 들어와 눕던 그 장면이...
마침 크게 비틀거리던 둘이 칵테일바 계단을 내려왔고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을 스쳐 지났다. 뭐라 생각하고 행동할 틈도 없이 모텔 장막을 젖히고 사라져버린 그들의 뒤를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자니 다시금 온갖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형용할 수 없는 미친 시간이... 1분이 1년처럼 흐르고 있었다.
피가 배어나올 만큼 꽉 쥔 오른 주먹을 왼 손으로 가까스로 하나씩 펴고는 핸드폰을 꺼내 쥐었다.
아직 문자가 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올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명훈이도 너무 취해 그냥 옆에서 잠드는 바람에 문자를 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핸드폰이 방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30년 같은 이 시간이 사실은 3초 밖에 흐르지 않아 아직 문자가 도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미 녀석의 머릿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저 어딘가의 미토콘트리아처럼 의미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쿵쾅쿵쾅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용기를 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의 전원을 눌러 꺼버렸다.
어떤 선택이던 그 끝은 모두 비극일 것이 틀림없었기에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우리 집이 있을 거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둘은 진짜 사랑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억겁의 연을 쌓은, 그렇게 만나기로 운명 지워진 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
둘은 사랑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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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과거의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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