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스와 알메르트 사이, 솜 강의 북쪽 30km 에 걸친 전선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공세가 시작된 첫 날에만 영국군의 사상자가 58,000 여명에 달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투였습니다.
(1 마일Mile : 거리의 단위입니다.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약 1.6km 정도 됩니다)
우선 이야기는 1915년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작전은 세심하게 준비된 편이었고, 포병과 보병의 연계 역시 계획대로라면 잘 이루어질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계획 : 공격 전 사전 포격으로 방어선에 진주한 독일군의 병력을 궤멸시킴 - > 보병을 투입, 적의 1차 방어선을 점령 - > 포병은 그 사이에 다음 방어선을 타격 - > 보병은 포병의 타격으로 인해 무너진 독일군을 향해 계속해서 진격함 - > 이하 반복. - > 공세 성공!
보시다시피 제대로만 이뤄진다면, 독일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16년의 솜은, 연합군이 기대한 것처럼 장밋빛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6월 24일,
연합군은 이 날부터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는 7월 1일에 이르기까지 영국군만 1,500여문. 프랑스군 역시 그에 준하는 대포를 준비하여 독일군의 진지를 향해 대규모의 사전 포격을 가합니다.
이 포격의 주요 목표는 보병의 진격을 방해하는 독일군의 악명높은 기관총과 철조망을 걷어내고 적 병력에 타격을 입혀, 무인지대를 건널 보병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었죠.
포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독일군의 진지는 겉으로 보기에 거의 쑥밭이 되고 맙니다.
연합군의 수뇌부는 750,0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돌격하는 영국군, 그러나 과연 이들 중에서 이날 무인지대를 살아 건넌 사람이 몇이나 될 지는 의문입니다.)
마침내 7월 1일 아침 7시 30분 경,
연합군이 미리 매설해 둔 17개의 지하 부설 지뢰 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연합군의 공세는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공세가 시작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적의 진지가 그대로입니다!!"
8일간의 사전 포격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진지와 방어선은 영국군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피해를 덜 입었던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독일군의 방어선이 너무나도 강력해 포탄마저 이를 뚫지 못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정답은 No 입니다.
문제는 독일군이 아닌, 영국군과 프랑스의 포병대에 있었던 것이죠.
당시 이들의 포병대는 보병과의 연계를 통해 공세에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이들이 그날 독일군 진지에 가한 포격은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효과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방어선의 80% 이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곳도 있었다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 포병대가 발사한 포탄들에 뇌관이 불량인 불발탄(...) 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발사한 포탄들도 진지와 참호, 철조망들을 날려버리는 폭발탄이 아닌 대인 살상용 유산탄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솜의 토양은 너무나도 물러져 있었고. 이는 간신히 제대로 떨어진 포탄들마저 폭파되지 않고 땅 속을 뚫고 들어가기만 해버리는 상황을 만들어버렸죠.
따라서 이들의 포격은 생각한 것만큼의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무방비한 상태로 무인지대를 건너 진격하는 연합군을 향해서 독일군의 십자포화가 그대로 퍼부어지게 되었습니다.
악명높은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 이들은 잘 짜여진 화망을 통해 연합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힙니다.
게다가 독일군은 8일간의 사전 포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은 공세가 시작되자 미리 대피시켰던 병력을 거의 온전히 유지된 방어선에 다시 배치해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잘 짜여진 기관총의 십자포화와 진흙탕을 뒤뚱거리며 건너는 영국군.
그 두 요소가 낳은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첫 주에 아주 짧은 거리를 진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이들은 공세 첫 날에만 58,000여명의 사상자 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죠.
반면 프랑스군은 이들보다는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방어자 독일군에 비해 막심한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었습니다.
7월 11일 무렵. 영국군은 독일군의 첫 방어선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7월 11일, 19일에 걸쳐 독일군은 대규모 병력을 통해 방어선을 보강했고. 영국군은 이를 알면서도 공세를 지속합니다.
덕분에 이 날부터 전투가 종결되는 11월 18일에 이르기까지, 솜의 전선은 살아있는 지옥으로 변하게 됩니다.
(수많은 전사자들, 전투의 참혹함은 연합군이건 독일군이건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전선은 이내 교착상태에 빠졌고, 무의미한 돌격과 그에 따른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후반 무렵, 영국군의 신무기 탱크 가 처음으로 전장에 투입됨에 따라 전장은 다시 약간씩 영국군의 우세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은 처음 보는 무기에 당황을 금치 못했고,
탱크의 활약에 힘입어 급기야는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몇몇 군데의 방어선이 영국군의 손에 떨어지기에 이릅니다.
(영국군의 탱크, 이들은 첫 등장을 성공적으로 장식하나...)
이에 자극받은 영국군은 공세를 다시 시작했지만, 한번 걸린 전술에 또 낚일 독일군은 아니었죠.
결국 전선은 다시 지리멸렬하게 원래대로 돌아가버렸고 이 상태로 11월 18일까지 지속됩니다.
전투는 11월 중순의 끝무렵 시작된 폭설로 인해 종결되고. 이로서 솜 전투 는 기록적인 사상자 수와 함께 끝나게 되었습니다.
연합군은 공격의 과정에서 영국군 42만, 프랑스군 20만의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고,
방어자 독일군 역시 50만에 이르는 사상자와 수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사상자를 낳고서 연합군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연합군은 솜 전투로 12km 의 진격을 하게 됩니다.
마일로 환산하면 약 7.5 마일의 성과지요.
이를 연합군 사상자로 나눠보면... (620,000/7.5 )
연합군은 1마일을 전진하기 위해서 약 82,7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셈이었습니다.
무려 8만명이 넘는 병사들의 피가 단 1마일의 초토화된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흩뿌려진 셈이죠.
8만 2천명의 삶.
이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만들어진 1마일의 가치입니다.
* 참고 영상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노래는 Paschendale - Iron Mai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