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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 2, 3가 개봉하였을 때 그러니까 대충 15~16년 전에 저는 학생이었고 실습생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를 가르치고 감독하던 분들이 영화를 보자고 하여 매트릭스 1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2편과 3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정황상 2편을 보고 한참 후에 3편을 개봉하고 또 같이 봤겠죠.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당시 내용은 잘 이해하기 힘들었고 잘만든 액션영화라고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케이블 티비에서 중간중간 짤라가면서 단편적으로 매트릭스 1편을 보기도 했었죠. 최근 갑자기 매트릭스가 생각나서 1편부터 정주행을 해봤는데 상당히 철학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제가 어듯 보기에 중요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장면이 꽤 있었지만 중요한 장면은 첫째, 컨스트럭터나 오라클이 이미 결정은 이루어져 있다고 한부분과 둘째, 니오베 함장이 모피어스와 사령관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면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혹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스미스 요원이 자유를 줘서 고맙다며 인이어 무전기를 버리는 장면 등 곳곳에 철학적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과냐 자유냐의 철학적 질문에는 위에 두가지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죠.
세상은 인과율에 얽매여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결과는 원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인과율에 관한 철학 불교철학에서는 인중유과론, 서양철학에서는 합리주의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은 각각 종속되는 것이 없이 자율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의 자율에 관환 철학 혹은 경험론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인중 무과론에 해당 될 것입니다. 모든것은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태양에너지에 의해 물이 증발을 하고 그 수증기가 모여 여러 기상상황의 원인에 의해 특정지역에서 비를 내린다고 하는 자연현상이나 악셀레이터를 밟아 연료스로틀을 열어 엔진이 더 강하고 빠르게 회전시켜 차를 더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는 과학의 영역 등에서 이미 대세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과율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직관적으로 맞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행위를 판단할 때는 상당히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 또한 인과율 안에 있으므로 내가 결정한 어떠한 행위가 사실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 앞의 상황에 의해 결정된 상황이라는 것이죠. 매트릭스에서 보자면, 인간과 기계의 싸움이라는 상황과 네오와 트리니티의 관계에 대한 상황이 네오에게 입력이 되면 네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결정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기 때무입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에 내가 전혀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찍어야 할때조차도 우리는 3번을 찍을지 4번을 찍을지 살아온 경험과 성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서 3번을 찍을 사람은 결국 3번을 찍을 것이고 4번을 찍을 사람은 결국 4번을 찍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더 확장이 되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갈지, 놀면서 사회경험을 쌓으면서 사회경험을 할지, 혹은 그냥 탱자탱자 놀지는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결정이 되는것이지 인간의 자유와 노력에 의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합리주의 자체가 어느정도 절대성을 인정하고 영원을 추구하는 형이상학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이런 도식이 대충 만들어 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인과율=인중유과론=절대성, 영원(아트만, 니트야)=/합리주의
반대로 모든 사건은 앞의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유체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냉장고에 생기는 성에는 같은 온도 같은 습도에 같은 모양으로 생기지 않고 우연에 의해 각각의 모양이 다르게 생기기도 하고, 모든 인과를 분석해도 주식시장에서 주가를 예상할 수는 없으며, 로또에 어떤 번호가 될지는 예상할 수 없고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각각이 자유롭게 우연하게 발생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유전자 돌연변이도 예상할 수 없으며 진화의 방향은 없다는 입장도 아마 비슷한 입장일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독립적이고 발생했다가 영향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극단으로 갈경우에 모든것은 의미 없다는 허무주의로 빠질 불편함이 있죠. 지금 내리는 눈은 곧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고, 피어있는 들꽃역시 항상성이 없이 곧 사라질 덧없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장면, 모든것은 다 결정되어 있고 네오는 그것을 따라가는 알고리즘에 불과하다고 오라클이 말하는 것은 합리주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네오가 그 인과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는지 계속 시험을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인식에 대한 합리론과 경험론을 잘 조합하여 선험적인식론을 주장했습니다. 인과율에 대해서도 합리론과 경험론을 조합하여 중도의 주장을 하였는데, 모든 사건의 전말은 결국 인과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각 사건의 계열의 처음은 자유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커피를 만드는 과정은 인과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냥으로 일정온도를 만들어서 땔감과 연결이 되면 불이 생기고, 불의 열기가 물을 끓이고, 뜨거운 물이 커피를 녹여서 커피 한잔을 만들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먹을 생각은 자유롭게 발생한다는 것이죠. 참 탁월한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부정하지도 않고, 인과를 무시하지도 않는 발상이죠. 물론 최근 뇌과학이나 유전학에 따르면 아침에 커피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경험과 유전에 의해 결정되어서 내가 커피를 먹으려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이미 결정되어 진 것이라는 의견도 타당해 보입니다. 어차피 제가 결정을 내릴 수준은 못되니까요.ㅎㅎㅎ 이 부분은 사람들마다의 의견이 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없다에 관한 장면도 물론 앞에서 나온 인과론과 많이 연결이 됩니다. 아무래도 변하지 않는 본질(영원, 니트야), 자아(아트만)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밑에 글을 써주신 분도 있지만 영원, 절대성, 절대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인정하는 측은 우리가 살면서 시시때때로 변하고 늙고, 성숙해지는 부분을 바라보기 보다는 이데아, 영혼 등 보이는 현상 밖의 진정한 세계를 인정하는 쪽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항상 변하고 멈춰있지 않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천국은 그리고 극락은 변함없는 플라스틱 조화처럼 멈춰있는 본질이거든요. 결국 세계를 이원화해서 보는 형이상학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문제는 그 세계는 경험할 수 없으며, 그 세계만이 진정한 선이고 아름다움이며 가치있다고 생각을 하기 쉬워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유한하며 끝이 있고 고통스러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를 직시하지 않고 이 세계는 천국이나 극락, 이데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해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궁극적인 목적인 저 세상을 위한 도구로만 견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또 반대로 세상은 항상 변하고 항상성은 전혀 없으며 지속적인 것이 없으니 덧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이 세상은 너무나 허무해 지겠죠. 피어있는 꽃은 곧 시들어 없어지고, 향기는 흩어져 없어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나가르주나의 중론, 양 극단의 중간을 추구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꽃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꽃이 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내앞에는 실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과에 의해 지배를 받느냐, 아니냐. 세상은 무상한 것이냐, 아니냐.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써봤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세가 바뀌겠죠. 단지 철학이 사변적이지만은 않은 실천적인 학문이라는 것이 이런 포인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과연 세상에 불변하는 것이 있을까요? 세상에 자유라는 것은 존재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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