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20대 후반이고, 부모님은 이혼한 지 꽤 되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지던 당시 아버지께서 정신적으로 많이 우울하시고 건강도 안좋으셨기도 하고
당시 제게 가족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탓에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꽤 오랜 시간 가출도 하고 했어서 아버지를 속상하게 해드렸다는 죄송함 때문에 집에 돌아온 후부터는 몇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아버지가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자꾸 뭐만 하면 결혼 얘기를 하세요.
예를 들어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다가도 나이가 서른이 다 돼서 저녁에 집에서 치킨이나 먹고 있어야 되겠느냐
같이 TV를 보다가도 니 나이가 몇살인데 저걸 재밌다고 보느냐 나가서 남자친구나 만나라
저도 직장인이다보니 주말에는 좀 집에서 쉬고 싶을 때가 많은데 주말마다 저렇게 집에만 있어서 어디 결혼은 하겠느냐 늘 그러십니다.
집에서 저한테만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면 그냥 걱정돼서 그러시겠거니 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겠지만
우리 딸이 나이가 곧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시집도 안가고 집에만 있는다, 이래서야 되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밖에서도 하시고는 그걸 또 꼭 집에 와서 제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인 분들은 물론이고 그냥 어쩌다 말 한 마디 엮게 된 모르는 사람들과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하시고 듣는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본인에게 맞장구를 쳐준다며 늘상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이 나이에 아직 결혼도 안하고 있는 제가 대역죄인이 된 것 같아 속상하고, 갑갑합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제 나이가 아직 결혼을 한시 급히 서둘러야 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들을 봐도 사실 결혼한 친구가 열 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정도기도 하구요. 세대가 다르다보니 제 나이가 아버지 눈에는 혼기가 찬 나이로 보이는 건 이해하지만, 그냥 듣고 흘리고 말기에는 저 스스로가 이 문제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저는 결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제 스스로가 결혼을 하는 미래를 꿈꿔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남자친구도 한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았고, 살면서 몇번 해봤던 연애의 대상도 전부 여자들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주 친했던 친구들 몇명은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철저히 숨겨왔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죽을 때까지 가족들에게는 절대 말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께 제가 동성애자라 결혼은 안할 거다, 라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버지는 그런 제 상황은 전혀 모르신 채로 본인의 결혼 생활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세상에 태어나 살다보면 당연히 결혼도 하게 되는 거라 생각하십니다.
친구들은 어차피 직장도 있고 하니 차라리 집에서 나와 혼자 살면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겠느냐 합니다. 저도 그럴까 생각했던 적이 많지만, 아버지께서 오랜 시간 앓고 계신 지병도 있고 아직 우울증도 겪고 계신 상태라 차마 아버지를 혼자 생활하시게 두기엔 제가 너무 불안합니다. 게다가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 내내 생전 부엌 일, 집안 일이라고는 해보신 적 없던 탓에 부모님의 이혼 후에는 제가 늘 집안일을 해와서 아버지가 혼자 생활이 가능하실까 하는 걱정도 많이 들구요. (형제는 하나뿐이고, 현재는 일 때문에 장기간 해외에 나가 있습니다.)
그저 제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답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계속 하실수록 올해는 이 나이를 두고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내년에는, 내후년에는 또 얼마나 결혼을 재촉하실까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죽어도 결혼은 할 일 없는 제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자책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최선이 아닌 듯한 상황에 둘러싸인 기분이라 요즘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결혼 때문에 아버지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일도 종종 생겼습니다.
대체 이 타래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이 악물고, 귀를 닫고, 그저 어르신 세대의 노파심으로 하시는 말씀이거니 하며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