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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자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변 분위기를 예민하게 살폈다. 오늘따라 햇살은 내 방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나는 급히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8시 25분. 오, 맙소사.
회사 출근은 8시 30분까지다. 나는 이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야하나 말아야하나, 밥은 뭘 먹어야 하나, 옷은 뭘 입어야하나 같은 평소에 하던 생각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점이 원망스러웠다. 그것은 뾰족한 대상을 갖춘 원망이 아니었다. 나와 내 주변 모든 것들에 대한(알람을 담당한 휴대폰을 포함하여),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저주였다.
8시 30분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다고 하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2년 전에 심한 장염을 앓아본 일이 있었다. 어찌나 장이 민감했던지 물만 마셔도 화장실에 가서 배를 부여잡고 앉아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때의 경험을 잘 떠올리면 어떻게든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단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뒤에 떠올린 모든 변명꺼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지금 내 상황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 곧 진실이 부족했다. 하지만 더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 그 어떤 변명이든 출근시간 전에 회사에 알렸더라면 어느 정도 믿음을 줄 수 있었겠지만, 출근 시간이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던 현실감을 잃고 나니 오히려 일말의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때 나타나는 그러한 안도감이었다. 모든 것. 나는 내가 포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취직하기 위해 애썼던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자체, 그리고 나의 존재 이유 이기도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절망감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시간은 9시 10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전화를 받기 전, 나는 꼭 말해야하는 몇 가지 단어를 추스르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목이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진수씨? 나야." 이 목소리는 재은 선배다.사무실에 드물게 있는 여자, 그리고 천사역할의 선배였기 때문에 선배가 내게 전화를 해줘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어? 아직 까지 출근을 안했네?" 나는 변명거리를 못 찾았고 결국 늦잠을 잤다고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성격답게 조용한 소리로 웃었다. "그럼, 오후 출근으로 해 둘 테니까 좀 있다 봐." 나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이토록 간단히 해결해준 선배가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말야, 진수씨 생각보다 잠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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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의 그 특별함을 제외하고는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오늘처럼 즐거운 적이 없었다.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죄라고 생각했던 일은 절차에 의해 정당하게 처리가 되었고, 나는 그에 따라 퇴근을 늦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비싼 일식집에 들러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근처 카페에 들러 카페라때도 한잔 마시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오후 업무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조금 머쓱한 마음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내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냉랭한 공기에 적지 않게 당황하며 내 자리를 찾아갔다. 책 상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나에게 옆 자리 시현선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3시까지 좀 부탁해."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칸막이에 먼지가 쌓여있다, 다과실 정리가 안 돼 있다, 화분에 물을 주기적으로 안준다 등등. 이러한 지적은 내게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진실과는 동떨어진 유치한 보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까스로 정리한 서류더미를 살펴보던 시현 선배는 말했다. "사장님도 너보다는 일찍 출근 하겠다." 나는 코너에 몰린 복서가 된 기분이었다. 현명한 복서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까? 아마 상대방을 지치게 만들며 종이 울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저녁 하늘은 노을이 져 형형색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쌀쌀해진 날씨 덕에 나는 따뜻한 짬뽕이 떠올라 집 앞 상가에 있는 단골 중국집으로 향했다. 사장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늘은 회사 안 갔어요?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 오늘은 정시에 퇴근을 해서요." 사장님은 거참 좋은 회사라고 나중에 우리 아들도 그런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럼 이 집은 제가 이어 받으면 안 되겠냐고 농을 던졌다. 나는 짬뽕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푸근한 침대에 누워 자유를 떠올렸다.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 복잡한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아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유는 오늘 저녁 같이 짬뽕이 먹고 싶을 때 짬뽕을 먹는 것이다. 나는 그 이상의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자유는 곧 돈이 아닐까. 취직하기 전까지 나를 끈질기게 따라 다녔던 가난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도 나를 떠나게 만들었다. 오늘 내 행동은, 깊이 잠들어 있던 그것을 다시 깨울것이다, 아마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좀 전보다 훨씬 더 볼품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해 줄 좋은 로션은 값어치가 비싼 법이다.
옅은 어둠속에서, 너무 오래 자고 있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나는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5시 25분. 알람보다 5분 일찍 일어났다. 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몸부터 해결하기 위해 바로 샤워를 했다. 어제 일은, 아침밥은 간단히 시리얼을 먹었다, 순전히 오기였을 뿐이야. 셔츠는 스카이블루를, 다시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넥타이는 남색바탕에 흰색 빗금이 들어간 것을 선택했다. 나는 다시 구원 받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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