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길냥이들에게 밥을 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길냥이들에게 밥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되는 듯 떨리고 낯설기만 했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소소한 일상이 되어 잔잔하니 물 흐르듯 편안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간단한 건데도, 세상만사가 그렇듯, 길냥이들에게 밥 주는 것 또한 처음엔 마냥 쉽지가 않았습니다.
밥 주는 세부적인 여러 기술들?뿐만 아니라, 길냥이들을 대하는 동네 분위기나 실제 행위들에 대한 처신 등등이 처음엔 많이 미숙하고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사소하나마 시행착오 또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오류를 바로잡아 주던 어미 길냥이에게 진 빚은 늘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험한 길 위에서 맨 몸뚱어리 하나로 생활하다 보니, 보통 길냥이는 지금 생존해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그 한 몸만 건사해내는 것이 아니라 새끼들까지 여러 마리 딸려 있다고 한다면, 그 강함의 증거는 더욱더 강력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미 길냥이가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저 같은 인간에게는 감히 어떤 외경과 경탄의 감정을 끌어내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껏 그네들에게 밥 주는 과정에서 어미 길냥이가 실존적인 지혜의 보고를 실제로 풀어 놓을 때마다, 그 추상과도 같던 감정이 구상의 불꽃으로 터져 나오곤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 녀석들에게 밥 주기를 시작했을 즈음엔 어미 길냥이가 그저 또래 새끼 길냥이들보다 약간 큰 체구의 한배 고양이로만 생각되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미 길냥이라고 해봐야 그땐 딱히 연령이 더 나간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던 것입니다.
최소한 외부적인 형태로만 보면, 새끼들이나 어미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체구나 크기가 서로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에서야 돌이켜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만, 아마 그 어미조차도 매우 이른 시기에 새끼들을 낳게 되면서 그 연령 차가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네들을 처음 관찰할 땐 그저 그 어미를 약간은 큰 새끼 고양이로 단정해버리고, 그네들 모두를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들인 줄로만 착각하여 딱한 그 처지를 가엾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나브로 그네들과 관계를 지속해나갈수록 다른 새끼들과는 달리 어미 길냥이의 행동방식이나 생존전략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녀석의 체구나 크기는 다른 새끼들과 비교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속속들이 삶을 대하는 그 행위나 방식은 엄연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분명 그 녀석은 다른 녀석들의 어미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사실, 어미 길냥이의 식탐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강한 편에 속했습니다.
지금의 야옹이 외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밥만 주어졌다 하면 들입다 앞뒤 재지 않고 퍼먹질 않나, 딱히 가려먹는 것도 없이 그저 먹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다 먹어 해치우질 않나, 여러모로 대식묘, 다식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어미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 것도 밥 주는 인간의 단순 착오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어미가 새끼들을 제쳐두고 자기 먼저 배 채우는 데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며, 밥이 좀 모자라다 싶은 날에는, 어느 어미가 자기 새끼들에게 하악질하며 앞발로 머리를 팍팍 때리고 신경질 부릴 것이라 생각하겠습니까?
그저 몸집 좀 된다고 행패 부리는 새끼들 중 하나일 것이라, 처음엔 그리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그네들을 알아갈수록 이 녀석의 눈에 띄는 특이한 행동들이 하나하나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장 먼저는, 그렇게 좋아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가끔씩 옆에서 출몰하는 다른 영역의 고양이들이 보이면 곧바로 식사를 멈추고는, 경계태세에 돌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자동차 아래에서 나와 다른 새끼들은 그 아래에서 밥 먹도록 내버려 두고, 자신만큼은 그 근처를 순회하며 안으로는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밖으로는 잠재적 위협요소들을 삼엄하게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녀석은 다른 또래 새끼들과는 처지가 분명 다른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녀석이 어미이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이 녀석의 행동 중에는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주차된 차 아래 말고는 일절 먹이를 먹으러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밥을 주다 보면, 어느 날은 자동차들의 배치가 밥 주기 까다롭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곤 합니다.
뭇 통행인들의 이목이 밥 주는 인간에게 집중되는 구도로 배치가 이뤄지거나, 그 녀석들이 오고 가는 다른 사람들이나 주차된 자동차의 잠재적 위험에 전혀 구애됨 없이 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땐 그냥 노상에다가, 혹은 저 멀리 텃밭 근처 음지의 귀퉁이에다가 먹이를 뿌려놓고 그네들을 기다리게 되는데, 다른 새끼들은 기어 나와서 먹을지언정 그 녀석만큼은 앵앵거리며 울고 불면서도 나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밥 주는 인간을 경계해서 그러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고 어느덧 밥 주는 인간과도 상당히 친해져 밥 줄 때면 앵앵거리고 몸으로도 부딪쳐 오는 그 녀석이, 여전히 지 밥 장소를 자동차 아래로만 고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릴없이 밥 주는 인간은 달리 돌이켜봐야만 했습니다.
근처 주위에 인적이나 어떠한 자동차 등의 움직임 따위가 포착되지 않을 때에도 그 녀석의 고집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밥 주는 인간이 가진 감각체계로는 미처 분별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위험을 그 녀석은 포착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위험스럽고 고된 삶이 아예 그 녀석의 행동양식을 그렇게 습관적으로 고정시켜 놓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그 녀석은 자동차 아래가 가장 안전하게 밥 먹을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녀석이 자동차 아래를 왜 그렇게 고수하는지 새로운 이유를 또 하나 짐작할 수 있게 된 사건이 우연히 발생하였습니다.
그날도 자동차 배치가 탐탁지 않아서 그나마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근처 언덕배기 흙무덤에다가 밥을 대충 뿌려놓았었습니다.
그러니, 그 어미 녀석은 배고프다고 앵앵거리면서도 올라와서 먹질 못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밥을 줘도 먹지 못하는 그 녀석 탓이지, 허구한 날 밥 주는 인간이 꼬치꼬치 밥 주는 장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여유는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새끼들은 어느새 기어올라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도 게걸스럽게 밥을 쪼아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과 대비되어 어미 길냥이가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이기는커녕, 한심하고 바보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새로운 장면이 급박하게 연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기 아래 골목에서부터 몇 마리의 길냥이들이 어슬렁거리며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근처에 사는 녀석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저 위에 놓인 밥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려가 그것을 맡고 이리로 흘러든 게 틀림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어떤 직감이 밥 주는 인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아마도, 여기의 지형 구조상 밥 냄새가 최대한 지연되고 은폐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자동차 아래가 아닐까, 그래서 혹여나, 냄새 따위로 꼬일지도 모를 다른 잠재적 위협요소들을 어미 길냥이는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것입니다.
분명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허구적이지만은 않아 보이는 추측이 떠오르게 되자, 어미 길냥이가 다시 한 번 빛나 보였습니다.
밥 주는 인간이 길냥이의 한낱 사소하고도 우연 어린 행동을 합리화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삶의 진주로서 조건화된 행위 방식을 제대로 추론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만, 제 생각엔 후자가 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잠재적 위험요소들을 밥 주는 인간 그 자신의 감각체계로는 미처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에 이르러서는 얼핏 그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어미길냥이에게 처음 느꼈던 그 어처구니없고 한심했던 기분은 말끔하게 해소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어미 길냥이가 어떤 녀석인데!
그리고 그런 어미 길냥이가 자동차 아래에서 나와 언덕 근처에 뿌려진 밥을 주워 먹던 자기 새끼들에게 알콩 한 대씩 쥐어박는 광경을 목도하였습니다.
그 녀석은 그렇게 새끼들에게 자신의 삶이 녹여낸 진수를 가르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그 녀석은 다른 녀석들의 어미인 게 틀림없었습니다.
지금의 야옹이를 구조하게 된 그때의 급박했던 상황도 돌이켜 보면, 어미 길냥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 또한 그저 개연성 있는 하나의 추론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왠지 이 경우 또한 어미 길냥이의 지혜가 빛을 발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밥 주는 인간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길냥이였던 야옹이가 3, 4일이 지나도 밥 먹으러 나타나지 않아서 애간장이 다 녹아내릴 때였습니다.
거의 체념과 포기 상태로 야옹이의 시신이나 건지면 다행이지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밥 주는 인간 앞에서 어김없이 맛나게 밥 먹는 어미 길냥이가 참으로 얄밉고 못돼 보였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웬걸, 그렇게도 보이지 않던 야옹이가 그날 밤, 밥 주는 인간이 정말 마지막으로 캔 따주고 돌아서려던 순간에 홀연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어미 길냥이의 새된 외침에 따른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때의 그 소리는 상당히 기이하고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평소 어미 길냥이가 내는 여러 종류의 소리와 음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매우 그로테스크한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어미 길냥이로부터 보고 들었던 무수한 소리들 가운데, 성행위 때의 그 비명인지 즐거움인지 모를 상당히 애매모호하고 특이했던 괴음과 더불어 가장 이상했던 소리였습니다.
그때의 소리가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밥 주는 인간은 차마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 연속된 정황으로 보건대 외침의 청자만큼은 야옹이였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정말 우연한 기회에 그 소리와 야옹이의 등장이 서로 잇달아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 소리에 대한 반응으로서 야옹이가 나타난 것인지 어떻게 검증하고 확인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저 추론만 할 뿐입니다.
이번에도 후자에 비중을 두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추론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비약적인 추론을 이어나갈 뿐입니다.
정황상 이 추론의 입구는 논리의 무덤들을 곁으로 싸고돌면서 오롯이 신산스러운 외길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적지 않은 시간들을 그네들과 함께하며 그때 그 사건을 공유한, 밥 주는 어떤 한 인간에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추론의 미로는 어미 길냥이가 이젠 글러 보이는 자기 새끼의 운명을 밥 주는 인간에게나마 최후로 맡겨보는 것을 끝으로 막다른 벽에 다다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추론이 제3자의 입장에선 외람되게도 어쭙잖게 들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또 한편으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밥 주는 인간은 그네들과 함께 또 다른 시공간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무지개가 피어났던 곳에서 제3자의 무지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 무지개들이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은 않기를 소원할 따름입니다.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본능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똑같은 행동을 똑같은 이유에서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 - 윌 커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