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 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붇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후에 부활 했는가>라는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경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이나 그것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 까지 한다.
불교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들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내에서도 그를 신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 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수가 고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그분(예수)이 정신이 나갔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까지 했음을 본다. 예수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사람들도 그를 <고작 장인(목수)>정도로 보았을 뿐 구세주와 같은 특별한 존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셉聆?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면, 어떤 제자는 부활한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확인까지 해야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은 두고서라도 당사자인 예수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 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역사상에서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는 신의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을때 보여주는 그 떳떳한 모습과 비교가 된다.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 데도 예수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히 죽음 앞에 섰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같이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와같은 <잡록된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의 그의 활동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는 신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역사상의 위대한 종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불가사이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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