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이 내일 무너질지 모르니 피하라고 했고, 당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말대로 피했는데 실제로 집이 무너졌다고 치자.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세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을 듯 하다. 그 첫째는 지금까지 언급한, '법칙' 또는 ‘자연법칙’이다. 이것은 주어진 예에서 당신에게 경고한 그 어떤 사람이 건축 토목 전문가인 경우이다. 즉, 전문가가 지금까지 확립된 자연법칙들을 기반하여 집을 측정하고 검사하여 분석해 본 결과, 집이 24시간 안에 무너질 것으로 예측된 경우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으로부터 수많은 것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하는 등의 대부분 자연현상은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되고 예측이 되며 통제가 된다. 집이 무너지는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법칙만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세세한 단계까지 설명하는 것을 불가능 하다. 우주는 법칙만으로 작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주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그 두번째는 ‘우연’이다. 이것은 앞의 예에서 당신에게 경고한 그 어떤 사람이 방금 지진 안전 교육을 받아 경각된 초등학생인 경우다. 즉, 책임질 능력도 책임질 생각도 없는 사람이 그냥 어쩌다 해본 말이 우연히도 맞아 떨어진 경우다. 물론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삼라만상의 현상에는 애초에 예측이 불가능한 무작위성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구가 한결같이 규칙적인 속도로 자전하고 공전하는 것은 움직임과 관련된 법칙에 따른 필연성 현상이겠지만 지구가 마침 태양의 세번째 행성이라는 것은 우연성 현상에 의한 것일 것이다. 특히나 양자역학 단계의 극 미시세계라면 그 상태부터 아예 확률적으로 규정된다. ‘참’이 확률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극 미시세계에서는 애초에 정확한 값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이 틀렸다 해도 여기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는다. 이런 극 미시세계을 구성조합으로 하는 거시세계의 현상에서는 어느 정도의 필연적인 오차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런 오차로부터의 자연원리 현상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법칙으로도 정립이 불가능 하다. 따라서 이런 것은 둘째, ‘우연’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법칙과는 달리 오차 범위 내에서의 우연적인 결과는, 설명은 할 수 있을지언정 확실한 예측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대비나 통제가 불가능 하다.
그럼 ‘법칙’과 ‘우연’만으로 모든 삼라만상의 현상들이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로부터 우주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가지 만으로는 거의 하나도 설명할 수 없는 분야의 현상들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마음현상이나 공동체 조직에서의 사회현상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앞서 언급한 법칙과 우연이라는 두 도구만으로는 조금도 설명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법칙과 우연만으로는 왜 필자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도입하여야 하는, 그리고 우주의 현상을 설명하는 마지막 도구이자 방법은 ‘목적’, 또는 ‘의도’이다. 이것은 앞의 예에서 당신에게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 그 어떤 사람이 당신을 협박하는 조직폭력배인 경우다. 그러니까, 이 경우 집이 무너진 것은 그 폭력배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법칙도 아니며 우연도 아니다. 법칙과 우연만으로는 생명체에서 관찰되는 고유 규칙, 즉 목적성은 설명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한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법칙과 우연으로 모든 자연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이것만으로는 단 하나의 심리현상이나 사회 현상도 재대로 설명할 수 없다. 법칙화된 마음현상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 현상에 따른 결과는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그러면서도 마음 현상에 따른 결과는 분명 무작위는 아니기 때문에 우연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 현상이나 사회 현상은 ‘목적’이라는, 법칙이나 우연과는 별개의 새로운 것을 도입, 또는 가정해야지만이 설명이 가능하다.
설사 백 번 양보해서 어떤 마음 법칙이 밝혀졌다고 쳐보자.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이 기존의 자연법칙들과 그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즉, 생명체의 현상, 또는 마음현상에서의 특성은 자연현상에서의 특성과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며, 나아가 둘 간에는 어떤 공통된 접합점이 있을 여지조차도 없어 보인다. 목적체의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목적성 현상은 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형태의 필연성 현상이다. 예컨대, 바람에 의해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은 자연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인류에 의해 나무가 잘려나가는 현상은 자연법칙으로 도무지 설명될 수 없어 보인다. 대신에 이런 결과는 인간이 나무를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쉽게 설명이 된다.
법칙과 목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사람과 같은 목적체가 가지는 성질인 “하(되)려는 성질”과, 물과 같은 비목적체가 가지는 성질인 “하(되)는 성질”을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다만, 그 둘을 속성을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나마 어느정도는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직관적으로 우리는 비목적체의 성질인 “하는 성질”의 원인은 “이유”를 통해 설명하려 하는 반면, 목적체의 성질인 “하려는 성질”의 원인은 “목적”을 통해서도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비목적체인 물이 100도가 되면 끓는 현상을 우리는 이유를 물어야 하는 주제로 여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끝은 아마도 자연원리와 만나서 자연 법칙으로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은 들어설 곳이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반면, 목적체인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성질의 경우, 우리는 그 현상을 목적을 물어야 하는 주제로도 여긴다. 그렇다면 비목적체에게서의 이유의 끝이 그러했듯이, 목적체에게서의 목적의 끝도 결국에는 자연원리와 만나게 될까?
다시 돌아와 내용에 사족을 좀 붙이자면, 처음의 예에서 당신에게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 그 어떤 사람이 점쟁이 였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서도 실제로 무너진 자신의 집을 법칙, 우연, 의도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경우에서라면, 신 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초월적인 절대자를 도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가, 우리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 작동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 알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위 세가지 가능성 도구, 즉 “법칙”, “우연”, “의도”부터 충분히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알고 보니 점쟁이의 계획된 덫에 의한 사기(의도)였을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은 한번쯤 맞을 수도 있는 순전히 우연에 의한 착각 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위 세가지 만으로는 현상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경우, 그렇다면 이제는 신 같은 새로운 것을 도입해도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럴 경우 그 현상은 일단은 대개 미지(未知), 즉 아직은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음 상태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해도 안되면, 그럼 새로운 도구를 도입할 여지는 아예 없는가? 아니다. 있다. 그 현상이 나아가 위 세가지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위 세가지 만으로는 설명될 가능성조차도 명백히 없는 수준이라면 어떻게 될까?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 세가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가정하겠다면 적어도 이정도 단계까지는 와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서 조차도 그 도입하고자 하는 그 다른 무언가는 최소한의 검증이 가능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럴 여지라도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알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알 수 없는 것을 도입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에 다가가는 측면에서 본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버리면 우리는 사실상 특별히 알아낸 것이 없으면서도 마치 현상을 설명을 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을 ‘신이 한 것이다’ 로 단정지어 버린다면, 상황은 ‘그것은 밝혀낼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불가지론적 관점이 아니라 ‘그것은 밝혀낼 생각이 없다’로 수렴된다. 중세 서양의 과학사를 살펴보면 이것은 나아가 ‘그것은 안 밝히려 했으면 좋겠다’, 또는 심지어 ‘그것은 밝히려 해서는 안된다’로 까지 발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관성: 바뀜이나 변함이 없는 성질
무작위성: 일관된 비일관성
우연: 무작위성을 가진 대상에게 존재하게 되는 유사 일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