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관능이 내 것이었던 때가..
여자는 증명된 사랑에도 불안해한다.
우울은 그저 기분일 뿐이다.
단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일 뿐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뇌에 생기는 감기다.
그것도 지독한 독감이다.
우울과 우울증을 혼돈하여 방치한다면
치명적인 폐렴에 직면할 수도 있다.
내게 있어서 우울증이란 기척을 주고 가끔씩 들리는 손님 같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편한 느낌으로 다가와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고, 내가 쫓아내려고 계속 눈치를 줘도 나가지 않으며 날 계속 괴롭
히더니 때가되면 그냥 가버리는 그런 손님.
있을 동안에는 정말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버리는 환영받지 못할 손님.
#. 바람둥이 물리치료사.
[물리치료실]
기브스를 풀고 다시 물리치료실 앞에 도착한 우리.
그녀는 기브스를 푼 게 신기한지 자신의 팔을 계속 만져보고 있다.
“그럼 치료 받고 있어라. 난 물리치료 끝날 때쯤에 올게.”
하고 말하며 그녀를 돌아서는 나.
“어이 잠깐! 어디가?”
“어디가긴. 나도 환잔데 병실을 계속 비워둘 순 없잖아.”
“난 잘 때 빼곤 병실 아예 안 들어가는데?”
“그건 니 얘기고..난 달라.”
“뭐가 다른데?”
“뭐가 다르긴. 난 항생제 주사도 꼬박 꼬박 맞아야 되고, 갑자기 열이 오르
면 해열제도 맞아야 되고, 피수치 내려가면 수혈도 받아야 되고, 쉽게 피로
해지는 몸이라 잠도 충분히 자둬야 한다구.”
하는 얘긴..씨알도 안 먹힐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자. 급한 일 생기면 간호사들이 전화 하겠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물리치료실 안으로 들어가는 나.
“들어갈 거면서 꼭 튕기기는..”
그때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
진짜 휠체어를 확 엎어버릴까??
물리치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환자들이 물리치료사에게서 개별 운동치
료를 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리치료 받으려면 정말 독한마음 먹고 버텨야 한다던데..
통증이 너무 심해서 눈물도 날 거라고 그러던데. 각오 단단히 하라고 그러
던데..”
그녀는 물리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많이 걱정 됐나보다.
참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죽고 싶어서 5층 위에서 뛰어내렸던 여자가, 정작 목숨을 건지고 나니 이런
물리치료를 겁내다니..
인간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물리치료 오늘이 처음이시죠?”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그녀와 나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흰 가운을 입고 있던 남자가 우리 시야 속에 들어왔는데, 넓은 어깨
가 돋보이는 건장한 체격에 핸섬한 외모, 짙은 눈썹까지..아주 출중한 외모
를 지닌 남자였다.
남자는 그녀와 내가 아무 대답도 없자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휠체어를 타고 있던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최윤정님 맞죠? 저는 담당 물리치료사 이영환이라고 합니다.”
“아..”
최, 최윤정..?
그녀의 이름이 최윤정 이였던가?
흔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물리치료사는 그녀를 여기저기 훑어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거 환자분이 상당히 젊고 예쁘시네요..^^;”
.............
문득 그에게 묻고 싶었다.
물리치료사가 처음 보는 여성 환자에게 “상당히 젊고 예쁘시네요.” 하는
멘트를 던지는 건, 자기 환자의 기분까지 맞춰주는 철저한 직업정신에서
비롯되는 건지.
아니면..모텔 입성을 전제로 한 멘트인지를..-_- 묻고 싶었다.
“아저씨.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우리 물리치료 언제 해요?”
아저씨? 풉...
아저씨라는 말에 웃고 있던 물리치료사의 표정이 굳어진다.
“최윤정님. 호칭은 선생님으로 해주세요.”
“싫은데? 선생은 무슨 선생이야. 귀찮아.”
“최윤정님. 여긴 병원입니다.”
“근데? 아저씨도 날 환자로 안 보고 여자로 보는 것 같은데..나도 아저씨
편하게 대할래.”
“.................”
그녀의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물리치료사의 얼굴에선 당황한 흔적이 여기
저기서 드러난다.
“근데 최윤정님. 왜 저한테 반말 하세요?”
기가 막히는지 언성을 높이는 물리치료사.
“억울하면 아저씨도 반말하던가.”
“최윤정님. 아저씨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난 한 살 많아도 아저씨라고 하는데 선생은 무슨~
물리치료 기사면서 선생 좋아하시네.ㅋㅋ"
-_-;;;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지만..물리치료사의 벙찐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자꾸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이영환 물리치료사.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듯 날 쳐다보면서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보지만..뭐 나라고 힘이 있겠는가?
나는 핸드폰으로 머리통까지 가격 당한 피해자라고..!
#.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물리치료는 2시간이 지나도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큰일이다. 병실을 이렇게 오래 비워두면 혼나는데..
안절부절 하던 나와 다르게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물리치료를 받던 그녀.
팔을 구부렸다, 폈다를 힘겹게 반복하는데..
그녀는 옆에 있던 이영환 물리치료사에게 묻는다.
“어라..아저씨?”
“예?”
어느새 아저씨라는 호칭에 익숙해져있는 이영환 물리 치료사. -_-
“이거 팔이 생각보다 빨리 펴지는데..원래 이런 거야? 다른 사람들은 물리
치료 받으면 엄청 아플 거라고 하던데. 근데 난 통증도 별로 없네..”
그러자 이영환 물리치료사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 이거 원래 이렇게 안 되는 건데..선생인 저랑 환자인 최윤정씨랑 서로
믿고 교감이 되니까 빠르게 되는 거예요."
그러자 콧방귀를 끼는 그녀였다.
“참나. 지랄하고 자빠졌네.ㅋㅋ”
그녀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물리치료사.
놀란 표정을 하고서 그녀에게 묻는다.
“최윤정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그녀의 확인 사살이 이어지고..
“지랄한다고.”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이영환 물리치료사.
어지러운지 이마에 손을 갖다 대더니 비틀거리면서 물리치료실을 빠져나
간다.
그런 이영환 물리치료사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를 던지는 그녀.
“짜식. 그 말에 삐졌나보네.”
-_-
더 이상 안 되겠다.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다.
그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어른이니까, 나이가 조금 더 많으니까..
정말 따끔하게 혼을 내주.....
진 못하겠지만-_-;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한다.
“야. 너 너무 심한 거 아냐?”
“내가 뭘?”
“담당 물리치료사한테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니..지금 그게 할 말이야?”
나의 그 말에 오히려 화를 내는 그녀였다.
“그럼 저 인간이 나를 느끼하게 쳐다보면서 자꾸 이상한 소리 해대는데 그
냥 참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웃으며 넘길까?!!”
“어!! 참아야지!! 그냥 넘겨야지! 최소한 이성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면 그
랬어야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그때였다.
다른 환자를 담당하고 있던 물리치료사가 그녀에게 소리친다.
“최윤정님 조용히 좀 하세요 물리치료실 와서 왜 그렇게 떠드세요?"
“아저씨가 더 시끄럽다.”
와....정말 무개념이다. -_-
대단하다. 박수까지 쳐주고 싶다.
예전에 내가 쓰던 글 ‘본드걸은 죽었다’의 박진미 이후로, 저런 무개념 캐
릭터는 처음이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박진미는 나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점.
그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_- 이라는 점..
물리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휠체어만 밀고 있었고, 그녀 역시 나와 대화하기
싫었는지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린 왜 이런 일로 다투게 된 걸까.
아니 사실 다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까 그 행동은 명백히 그녀의 잘못이다.
난 잘못을 있는 그대로 지적해준 것뿐이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삐져버리면 ..어쩌라는 거냐?
그녀는 자기밖에 모르는 너무 이기적인 인간이다.
“난 말야.”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남자가 나한테 좋아한다느니, 귀엽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말 지껄이는
거 엄청 싫어해.”
“왜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잖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노
력 이라도 보이는 게 우선 아냐?”
“................”
“좋아하면 천천히 다가가야지, 마음을 열도록 노력해야지, 싫다 그러면 기
다릴 줄도 알아야지. 좋아하면서 그런 것도 못 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저 여자 한 번 넘어트려 보자는 심보로 접근해서..입에 발린 말들 늘어놓는
인간들. 정말 증오하고 저주한다. 좋아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지, 왜
자꾸 지랄 같은 말만 씨부려대? 말 몇 마디 해보고 여자 반응 시큰둥하면
또 다른 여자 찾고..도대체 그게 뭔 짓거리야? 그게 사랑이야? 안 그래?”
“음..뭐..”
그녀 앞에선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머릿속으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과거에 사랑 때문에 아파본 경험이 분명 있을 테고, 그 경험 때문
에 지금까지 남자를 믿지 않고, 달콤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하자 문이 활짝 열린다.
난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선 8층에서 내린다.
“이제 어디로 가?”
“약속했잖아. 아는 언니 소개시켜주겠다고.”
“아..”
“그 언니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쪽으로 가야지.”
깜빡 잊고 있었다.
난 오늘 그녀가 소개시켜주겠다던 여자를 만나기로 했었지..
“근데 아저씨.”
“응?”
“아저씬 그런 거 안 궁금해?”
“뭐 어떤..?”
“누가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면..그 여자에 대한 사전 정보 같은 거..
궁금할 거 아냐. 뭐 물론 얼굴이 가장 궁금하겠지만..”
헉..예리하다..
“아저씨도 남자잖아? 그 언니 예쁜지, 몸매는 잘 빠졌는지, 뭐 이런 거 궁
금할 거 아냐?”
물론 예전의 나였다면..그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를 녀석인데..
몸무게가 40kg도 안 되는 녀석인데..
머리카락도 한 올도 없는 녀석인데..
지금의 난 정말 봐줄 것 하나 없는 녀석인데..
이런 주제에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며, 만남 그 자체에 의미를 두
어야 한다.
“난 여자 얼굴 같은 거 전혀 안 따져.”
가끔 이놈의 주둥아리란..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_-;
나의 그 말에 밝게 웃고 있는 그녀.
“왜, 왜 웃어?”
“왜 웃냐니..난 웃으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닌데..이상하잖아. 평소 잘 웃지도 않던 애가..”
“별 거 아냐. 그냥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아서.”
“으, 응?”
“바보냐?? 한 번 말하면 좀 알아 쳐먹어라.”
“아니 진짜 제대로 못 들었어. 뭐라고 했는데?”
“됐어. 휠체어나 밀어.”
머릿속이 멍해져선..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휠체어를 밀기 시작하는데..
그때 내 귀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거 같다고 그랬어. 아저씨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어. 이제 알아들었냐?”
...........
바보같이..
남자들의 뻔한 거짓말을 그렇게 믿어버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계속.
재밌게 읽으셨다면..추천 부탁 드려도 될까요.
출처 http://cafe.daum.net/Lovepool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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