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인가 진격의 거인이라는 일본 만화가 이슈가 됐었다.
복잡미묘한 스토리와 함께 작가의 우익 논란으로 관심이 줄면서 요즘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만화가 엄청난 이슈가 된 이유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먹이 사슬의 정점에 오른 인간이 오랜 세월 잊어왔던, 먹힌다는 것에 대한 공포.
가축처럼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떨며 살아야 한다는 공포.
인간과 가축의 입장 전환.
사실, 이런 발상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잡아먹히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나 만화는 부지기수로 많고,
세기말적 디스토피아에서 아주 좁아터진 피난처에 갇힌채,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소모해가며 연명하는 가운데
생존자끼리 꿈도 희망도 없는 생존게임을 벌이는 이야기도 상당히 많다.
이 만화가 기존의 이야기들과 달랐던 것은 이런 요소들을 아주 잘 조합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함으로서 효과를 극대화 했다는 점이다.
흔히 인간이 잡아먹히는 내용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포식자는 인간이 아니다.
쥬라기 공원, 고질라, 에일리언, 죠스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피식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 뿐이다.
식인은 끔찍한 괴수들의 포악한 행위일 뿐. 우리는 거기에서 달아나기만 하면 될 뿐이다.
진격의 거인 속에서 포식자는 거인,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다.
이들의 먹는다는 행위는 '고기를 먹는다'는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를 뭔가 이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그 피식의 대상은 인간. 이들의 관점에서 거인은 인간을 잡아 먹을 뿐인, 대화도 통하지 않고
항거불능인 거대한 존재다. 이것은 마치 인간들이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들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 같지 않은가?
먹는 것도 인간, 먹히는 것도 인간. 이 지점에서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과 짐승이 인간을 먹는 것은 나란히 겹쳐진다.
사실 인간 아닌 인간, 이를테면 좀비나 구울, 흡혈귀 같은 존재들이 인간을 먹는 이야기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 속에선 '먹는다'는 행위 자체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감염', 내가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경우가 많고,
'먹는다'는 행위의 잔혹성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고전적인 이야기들 속에선 먹힌다는 것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아이들의 동화에선 늑대나 호랑이의 배를 갈랐더니 잡아먹힌 아이들이 멀쩡히 튀어나온다거나,
성경에선 고래에게 통채로 삼켜졌던 요나가 질식사하지도 않고 위산에 녹아버리지도 않은 채 살아서 돌아온다거나
하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이 흔하다.
진격의 거인에는 이런 동화적 심상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꿈도 희망도 없는 잔혹성이 있다.
거인의 배를 가른다고 해서 먹힌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먹는다는 것은 씹고 뜯는 것이니까, 먹힌 사람들은 이미 짓이겨진 고기 덩어리다.
물론 주인공 보정으로 먹히고도 살아온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시도조차 진격의 거인이 최초는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 TV에서 율리시즈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1954년 작인 듯 하다.
그리스 신화를 다룬 이 영화엔 키클롭스라고 하는, 눈이 하나뿐인 거인이 나온다.
뭐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키클롭스가 율리우스(오딧세우스)의 선원들을 잡아먹는다.
몸통을 쥐고, 핫바 먹듯이 머리부터 뜯어 오독오독 씹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앞뒤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충격적이었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잔혹한가.
누구나 한번쯤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봤을, 길거리의 수많은 고깃집 간판들.
고기를 든채 웃으며 입맛을 다시는 수많은 소, 돼지, 닭, 오리들...
도살 당하고, 조각나고, 조리해서 씹어먹힌다는 끔찍한 미래로부터
벗어날 어떤 희망도 없이 좁은 철창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가축의 끔찍한 삶을 생각한다면,
이런 간판들이 그냥 웃기게만 보이진 않는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율리시즈를 봤던 그 어린 날에도,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지금까지도 잘만 고기를 먹고 있다.
잔혹하다고 해도,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자에게 풀을 뜯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선택이지만,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순수한 양심과 윤리적 동기 이외에는 없다.
나는 문제가 다른데 있다고 본다. 그 가학성과 잔혹성을 외면한다는 문제.
현대에 인간이 섭취하는 고기의 대부분은 고도로 집약된 공장식 축산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다.
가축들은 선 자리에서 뒤도 돌아볼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힌채 평생을 보내며,
오직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 삶이 아닌 삶을 살다가 고기가 되어 죽는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런 가축들의 삶에 대한 일말의 상황도 모른체, 마트에서 포장된 고기를 사면 될 뿐이다.
수렵의 시대에 동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대상이었고 사냥감인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농업의 시대에 동물들은 생존을 위한 협력자이자 가족이었고, 고기를 얻기 위해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자 기쁜일인 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엔 그냥 고기일 뿐이다.
나는 수렵시대나 농업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들어서 그렇게 생각할 뿐, 그 진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현대의 공장식 축산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알고 있다.
그 잔혹성을 직면하고 감당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
가축들은 공장으로 사라져 일반 가정에서 볼일이 없지만, 애완동물, 소위 반려동물들은 여전히 가정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개들과 소통하고 교감하기에, 개를 먹는 것이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개를 먹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은, 소나 돼지, 닭을 먹는 것도 그만큼 끔찍한 일이다.
공장식 축산 덕택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쉽게 외면할 수 있을 뿐이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어떤가. 사람들은 귀엽다고 너무나도 쉽게 애완동물가게에서 개를 산다.
그 개들은 '개 공장'에서 태어난다. 제때 팔리지 않아 팔수 없게 된 개들은 도살 되거나 식용으로 팔린다.
공장식 축산의 소, 돼지, 닭 못지 않게 끔찍한 환경의 삶,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수많은 개들이 늙어서, 병들어서, 더이상 귀엽지 않아서, 돌보기 귀찮아서 길거리에 버려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장 눈앞의 귀여운 강아지만을 생각할 뿐, 그들의 과거나 그들의 미래에 대해선 외면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에 쉽게 잊어버린다.
개를 키우는 것은 사실은 개를 먹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아닐까?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시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장식 축산이 이뤄지는데도 이유는 있다. 공장식 축산이 없어진다면,
나 같은 사람은 하루 한끼 고기반찬을 먹기도 힘들어질만큼 고기 값이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쎄.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소모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고 있다.
태평양에는 한반도의 몇십배나 되는 면적에 걸쳐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된다면, 그 이면의 너무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말하는 효율성, 생산성, 경제성이 정말로 효율적이고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것일까?
쓰레기를 무더기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진 않을까?
조금만 덜 효율적이고 덜 생산적이라면, 인간과 동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조금더 신경쓸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른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면해온 그 문제가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