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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뿌리가 가지에 영양분을 주지 않고 땅속의 뿌리를 키우는데에만 매진해 있다면 그 나무는 결코 꽃을 피우지 못한다. 반면 가지로 뻗어나간 발심(發心)이 뿌리와 소통하지 않고 그 가지에만 머물러 있으면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꺾이면서 나무 자체를 고사시킨다.‘나를 찾는 활동’과 ‘사회 참여 활동’이 종합되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나를 찾는 활동 - 자기 성찰 활동’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낮추고, 비우는 활동이다. 이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근원으로 돌아가는 활동에서의 비우고 낮추는 의지는 인간성의 폭을 깊고 넓게 만들고 잠재력을 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근원으로 돌아가는 활동 뿐이라면 이는 끝 간데 모르는 신비주의와 관념론, 감성론으로 치우칠 수 있고 허공에 붕뜬 삶으로 점철 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사회 참여활동 - 사회 비판 활동’은 세상을 비판하고, 스스로를 높이며, 채우는 활동이다. 이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활동]과 반대로 [현실을 구체화 하는 활동]이다. 현실을 구체화 하는 활동은 우리 삶의 실질적 생기를 더해주는 활동이다. 하지만 현실을 구체화 하는 활동뿐이라면, 이는 잠재된 가능성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맹신하는 감각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경향성의 존재인지라 어느 순간 이 양자의 한쪽 방향으로 쏠리다보면 반대쪽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오직 한 방향으로 매진하게 된다. 거기에 바로 치우침 = 균형의 붕괴가 발생하는 것이다.
앞서 나무의 예를 들었지만 이는 비유를 통한 설명일 뿐, 실지로 나무는 생래적으로 뿌리와 가지 사이의, 다시 말해서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에, 질료와 형상 사이에 그것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대지 위에 구현해 낸다. 반면 인간은 그러한 균형을 맞출 장치(천균, 양행)만을 갖고 태어났을 따름이고 그것이 알아서 균형을 맞춰주지는 않는다. 그 능력을 발하여, 양자(나를 찾는 활동과 사회활동)를 아우르고 통합하여 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한 양자 사이를 소통하고 균형 잡는 능력은 단순히 ‘나’와 ‘사회’의 이분법을 통합하는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 다리를 놓고, 카오스와 질서를 하나로 묶는다. 그것은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것과 가장 강력한 것을 종합하고, 가장 큰 슬픔과 가장 큰 기쁨 사이를 균형 잡는 역할을 한다. 가장 온건한 것과 가장 극단적인 것을 하나로 엮으며, 가장 별 볼일 없는 것과 가장 위대한 것 사이를 이어 내는 힘까지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양자를 소통할 능력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로 체현할 능력이다.
이러한 힘이 있는 이들은 슬픔과 기쁨이 한 줄기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과 쾌락을 따로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이 나와 다르다고 분노하지 않고, 차이가 있음을 넉넉히 받아들이는 여력이 있다. 부조리와 증오에 맞서다가 그에 휩쓸리는 우를 범하지 않고, 치열히 싸우면서도 덤덤히 현실을 관조하는 여유를 가진다. 있다고 우쭐대지 않고, 없다고 기죽지 않는다. 강하되 부드럽고, 비천한 것 같으면서도 고결하며,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부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싸우지 않는 삶에 머물지도 않고, 싸우기만 하는 삶만 안주하지도 않는다. 그 능력을 갖추는 것은 한편으로 ‘수신’이고, ‘득도’이며, ‘구원’이고 ‘건강한 정신’을 획득하는 길이다.
응용해 보자면. 문재인 대통령이 잘한다고 극렬하게 지지하는 것이나, 못 한다고 맹 비난을 일삼는 것이나 미혹한 세태에 휩쓸린 결과라는 것이다. 균형을 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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