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호 사건인데 정말 답답하네요...
오마이뉴스라는 곳에서 기사의 일부만 옮겨 온건데 읽어 보고
잘 이해 안되면 검색창에서 동원 쳐 보세요..
소말리아 갈 때 겁이 많이 났다. 이 자리도 겁난다."
소말리아에서 해적에게 피랍된 동원호에 올라 해적과 맞서며 동원호 사건을 취재한 용기는 어디서 나왔던 걸까? 떨리는 목소리로 김영미 PD가 말했다. 당시 피랍됐던 동원호 항해사 김진국씨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자, 눈물을 글썽이던 김영미 PD는 급기야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10일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라운지에서 언론개혁 시민연대, 한국PD연합회 주최로 열린 'PD저널리즘과 독립PD 취재권 수호를 위한 기자회견'에 나타난 김영미 PD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소말리아 간 거 후회하지 않아"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길 했으니 나은데, 그때 우리 선원들 만났을 때 벅찬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한국 와서 계신 모습 보면 아직도 실감 안 날 때가 많다. PD로서 최선 다했고 지금도 최선 다하고 싶다.
재판 가는 동안 마음 고생 많았지만, 맘 속 염두에 둔 건 그랬다. 이건 과정일지 모른다. 한국에 태어나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서 생기는 과정일지 모른다. 이걸 이겨야 다음 언론인들은 세계 각국을 뛰어다닐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질 수 없는 이유다. 사람들이 '김영미 보니까 저러다 다치는구나. 난 다치지 말아야지' 할까봐, 아파도 아프다 말할 수 없고 다쳐도 다쳤다 말할 수 없다.
이라크 갔을 때 이라크 파괴된 현장 보며 생각했다. 이 나라가 50년 뒤 한국처럼 발전할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한국은 고속성장한 나라다. 이 자리 서서 PD의 취재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독재시대엔 할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이 시대 태어난 언론인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는 것도 겁나지만, 겁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난 일개 프리랜서지만 이 사건은 일개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 생명이 걸린 문제다. 그 선원들 가족이 있었고, 대한민국 모두가 아내가 돼서 아들이 돼서 기다릴 수 있는 문제였다. 앞으로 어떤 순간이 와도 상황에 굴하지 않고, 저널리스트로 성장할 거다. 외교통상부가 일개 프리랜서라고 하건, 나도 전 국민이 알권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도 변한다. 세계 나가서 호기심 갖고 알권리 전하는 저널리스트들이 나 말고도 많이 생겨났다. 외교통상부는 그 흐름을 막지 못할 거다. 외교통상부가 요청한 대로 반론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외교통상부와 MBC만의 관계가 아니다. 동원호 선원들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황당하겠냐. 끝까지 싸우리라 결심했다.
어떤 순간 와도 소말리아 간 거, 후회하지 않을 거다. 소말리아 간 느낌으로 계속 싸워나갈 수 있을 거다."
"김영미 PD 아니었으면, 우린 원혼으로 떠돌았을 터"
이어서 그 당시 소말리아에 갇혔던 동원호 항해사 김진국씨가 말을 이었다.
김진국씨는 "저희들이 죽음의 위협 속에 하루하루 살아갈 때 100일 만에 김영미 PD가 나타났을 때 천사를 본 느낌이었다"며, "당신이 우리가 어려웠을 때 우릴 도와줬으니까, 우리가 풀려나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음 좋겠다 약속한 게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진국씨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번 김영미 PD가 법정에 섰을 때도 한 번 참석한 적 있다. 그런데 사실과 다르게 너무 고통 받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자리 선 동기는, 목숨을 담보로 100일간 있었던 일, 왜곡된 이야길 증언하고 싶어서다. 김영미 PD가 개인 명예를 위해서 그 험한 길을 자칫 위험할지 모를 목숨까지 걸고 찾아왔겠냐?
그때가 생생히 생각난다. 김영미 PD가 나타났을 때, 가녀린 처자가 나타난 걸 보고 처음엔 이해 못했다. 그런데 김영미 PD는 흥분한 선원들을 진정시키고 끝내는 해적과 맞서는 것도 불사했다. 우리가 해적을 치자고 했을 때 김영미 PD의 하얗게 변하던 얼굴이 생각난다.
그런 긴급 상황에서 선원들을 진정 시키며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리는 김영미 PD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우리 절박한 상황 다 봤으니, 한 번 왔던 길이니 다시 한 번 와 달라. 여의치 않으면 모금이라도 해서 와 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억지였고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너무 절박했다. 그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김영미 PD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김영미 PD를)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 중에 협상 관련한 보험이 있다. 회사가 보험을 들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안 들었다. 왜 안 들었냐고 하니, 회사 재정상 막대한 돈이 들 수 있어, 안 들었다고 하더라. 협상 초기에 왜 협상 전문가를 안 썼냐고 하니, 그 사람 하루 월급이 내 한 달 월급이라고 하더라.
정부 측은 그 가난한 회사를 협상 전면에 내세워 아무 지원 없이 등만 떠민 형상이다. 그래서 117일이란 시간이 흘렀고, 마지막엔 액수가 더 불어나는 동기가 됐다. 40만 달러, 50만 달러가 든 돈이 됐다.
그건 한국 돈으로 치면 4억에서 8억원인데, 25명 목숨이 4억에서 8억원보다 중요했는지 지금도 아쉽고 의문이 남는다.
정부 측에 부탁하고 싶은 건, 제2, 제3의 동원호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해달란 거다. 경제대국 이런 얘기로 국민 위안하는 것보다 국민 한 사람이 어디 가서 묶여있더라도 국가 지위에 걸맞은 그런 정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원호 항해사 김진국씨가 감정이 복 받힌 듯, 한 마디 덧붙였다.
"그 당시 김영미 PD가 취재 안 했고 헛소문대로 우리가 죽었다면 아프리카 먼 바다에서 한 맺힌 원혼으로 떠다닐 수도 있는 상황 아니었냐? 돌아와 다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김영미 PD가 이걸로 고통 받으니까, 이 자리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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