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기숙사 동아리 엠티를 가서 유사강간을 당했다.
술을 좀 마시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누군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누군가 깨는 소리가 들리니 가해자는 그 사람을 재웠고 다시 와서 쓰다듬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게 됐다.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질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 손을 그대로 잡아 빼고 놓지 않은 상태로 가해자를 확인했다.
술자리에서 웃고 떠들면서 지내던 오빠라는 사실이 더 소름끼쳤다.
사람이 의도치 않은 상황에 놓이면 이렇게까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모두들 술에 취했고, 잠에 취했다.
지금 당장 소리를 지르고 뭐라 해봤자 다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 할 거다.
가해자에게 날 밝으면 얘기하자고 한 뒤 소파에 고쳐 앉았다.
담배를 피고 온 다른 오빠들로 인해 가해자는 더 이상 뭘 하지 않고 침대로 가 잠에 들었다.
더이상 잠에 들 수 없어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날이 밝고 잠깐 깼던 언니에게 가 새벽에 일어난 상황을 보았냐고 물었다.
잠결에 만지는 거 같아서 이름을 불렀다고 답했다. 목격자가 되어줄 수
있냐고 부탁한 뒤 다른 오빠들을 다 깨워 상황 설명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누구도 술을 많이 마신 내 탓을 하지 않았고 왜 짧은 바지를 입었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너는 잘 못이 없어."라고 해주었다.
확신을 갖게 됐다. 나는 잘 못한 게 없다.
회장오빠가 가해자와 이야기를 했다.
나와 이야기 하고 싶다길래 무슨 얘길하나 나가봤다.
보자마자 자긴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다.
이성적이고 뭐고 열이 확 받아서 오빤 나한테 사과부터 해야 정상이지 않냐고,
회장오빠한테 얘길 들었으면 나한테 미안하다하는 게 가장 먼저 할 일인데
왜 변명부터 하냐고 따박따박 말했다.
회장오빤 이야기에 끼지 않겠다 한 말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순간 치밀은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자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경찰에 신고는 하지 말아달라 했다. 자기도 살고 싶다 했다.
내가 왜 오빠 상황까지 봐줘야 돼요? 피해자는 난데? 하고 대답했다.
스스로 이성적이고 냉정하다고 과대평가했던 거 같다.
반복되는 부탁과 거절. 결국 나는 신고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대신 기숙사를 나가달라 했다.
일단락 되는 거 같았다.
집에 돌아와 다시 정리하며 생각하니 이건 고의성이 너무 짙었다.
충동적이었다면 한 번 만지고 기척에 놀라 그만 뒀으면 다시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성이 짙었고, 기억을 못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됐다.
회장오빠를 통해 아무래도 신고를 해야겠다고 말을 전한 뒤 경찰에 신고를 했다.
진술서를 쓰고 다시 기숙사를 돌아오는 동안 이게 맞는 일인가 생각이 들었다.
스물 두 살. 나랑 한 살 차이 난다. 앞날이 긴 사람이다.
내가 이 앞을 막는 게 아닌가, 개인에 대한 동정이 들었다.
같이 경찰서에 간 동아리 오빠는 세상 어떤 미친 피해자가 가해자를 동정하냐 날 타박했다.
친구는 왜 아주 그 사람 앞길에 진달래꽃이라도 뿌려주지? 하며 빈정거렸다.
내가 잘 못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미 신고까지 접수한 마당에 동정 정도는 해도 괜찮을 거라 합리화를 했다.
같은 기숙사에 사는 사람이니 경찰은 날 데려다 주고 바로 가해자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두어시간 지난 뒤 회장오빠가 조심스럽게 내게 전화를 했다.
가해자의 어머님께서 나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괜찮냐는 물음이었다.
합의 내용이 포함될 걸 알았지만, 우선은 괜찮다고 했다.
서명을 받으러 찾아온 경찰은 내게 자기도 나만한 딸이 있다면서 상처가 클 텐데 괜찮냐고 물어봤다.
서에서는 가해자가 울고불고 난장판도 아니란다.
가해자의 어머님은 내게 전화해 괜찮냐고 물으신 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이 얼마나 바르고 착한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듣기 싫었지만 끊을 수도 없었다.
내일 만나자고 하시면서 너무 상처 받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바보같이 가해자 어머님께 걱정이 많으실텐데 마음 잘 추스리시란 말을 했다.
정작 나는 아직 우리 엄마한테 말을 못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학교 보내면서 걱정이 많은 엄마였다.
집 앞에 학교를 다니는 동생보다 늘 내 걱정이 더 많았고, 집에 한 번 가는 날이면
이거저거 다 싸주고 건강부터 치안까지 모든 걸 걱정하는 엄마한테 난 차마 사실을 말 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걸 혼자서 진행해가면서 엄마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지만 듣는 순간 울음이 터질 거 같아 전화도 한 번 걸지 않았다.
처음 유사강간을 당한 순간부터 가해자의 어머니와 통화하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강해져야 했다. 강해져서 엄마 가슴에 대못 박지 않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상황이 무서웠고, 지금도 이런 일이 언제 재발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날 두렵게 한다.
가해자의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고, 마음 같아서는 합의도 해주기 싫다.
모든 생각들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해진다.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쉽게 가시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어떻게 해야 내가 잘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울지 않았고,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