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 알게된 학교 선후배였죠.
아... 얼굴이 매우 예쁘다는건 안비밀입니다. 뻥 5% 보태서 이나영 닮았어요.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에겐 남자친구가 있었지요. 사진을 보니 잘생겼더군요.
그리고 학교 내에 호위기사단을 자처하는 노예오징어들도 많았습니다.
저요?
솔직히 남자들 속마음은 다 똑같을진대...
예쁜 여자에게 끌리지 않는다는 남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나름대로 노예오징어들과는 차별화된 자존심을 지키겠다면서 여자로 대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던거 같군요.
단지 남자들에 둘러싸여 하루에도 몇번씩 대쉬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그다지 자신감이 안생기던건 나름대로의 이유이긴 합니다.
뭐... 맞습니다. 소심했네요.
단순히 오락실이라는 취미가 비슷했기에 시간 맞으면 만나서 같이 노는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요.
정말로 3~4년 동안은 가끔 만나서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친구로만 지냈고...
서로 각자의 생활에 바빠서 급기야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순간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항상 예상할 수 없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다가오지요.
어느날 만나서 저녁만 먹고 집에 바래다 줄 때 차 안에서 녀석이 제게 넌지시 물어보더군요.
저랑 사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할꺼냐고.
한 5초 가량 침묵하다가... 깊게 고민하지 않고 지금처럼 형동생으로 지내자고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같은건 없었어요.
어차피 저 아니더라도 사랑한다며 들이대는 남자들이 많은데 굳이 그 피튀기는 전쟁에 참여하긴 귀찮았거든요.
순간적으로 그 애의 서운했던 표정이 스쳐가는걸 못봤다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말이지요.
근데도 그땐 눈치 없이 그냥 난 잘했어 하고 속으로만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결혼한다고 연락이 왔지요.
일에 치여 살며 연락은 거의 못했던 사이에, 남자를 만나서 결혼 승낙 받고 뱃속엔 혼수까지 장만했던 모양입니다.
그때사 아차 싶더군요.
평소에 그 애는 30대 초반은 되야 결혼할거라고 말하고 다녔기에 정말 내가 결혼할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너한테 청혼하겠다고 말은 했는데...
6개월 전의 그 표정이 제일 먼저 떠오르며 제가 큰 실수를 했다는걸 깨달았지만 어쩌겠어요.
더이상 그 애만한 여자는 만날 수가 없다는 뒤늦은 후회뿐인걸...
후배 시켜서 축의금만 좀 전달하고 결혼식에는 안가려고 했습니다만...
전날 전화가 와서 진짜 안올꺼냐고 묻는데... 가야죠?
네... 갔습니다.
아침까지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부리나케 청바지에 후드집업으로 챙겨입고 면도도 안한채요.
더이상은 만날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차려입는 예의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신부대기실에서 잠깐 이야기하다가 시집가면 앞으로 못볼텐데 한번 안아주라길래 안아만주고 결혼식은 뒤로 한 채 헤어졌네요.
그렇게 3년정도가 지난 뒤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애네요.
조촐하게 둘째아이 돌잔치를 하려는데 문득 제가 생각났답니다.
와줄수 있냐는데 목소리 들으니 보고 싶어지는걸 어떡합니까?
가야죠? 안된다고요?
지난 일은 어쩔수 없습니다. 갔습니다.
가보니 애아빠는 없네요.
어디갔냐고 물어보니 해외장기출장이라는군요.
7~8개월마다 나갔다가 두어달 들어온다면서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죠.
돌잔치가 끝나고 촌수가 먼 삼촌 자격으로 둔갑해서 손님들 배웅까지 끝내고 따로 시간을 가지니...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겁니다.
시어머니와도 사이가 안좋은데 남편과의 사이 역시 그렇게 좋지 못했더라고요.
1년에 두세달 부대끼는데 정이 드는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시아버지는 집안일에 신경쓰 실 생각 자체가 없으신 분이었고, 친정에 기대자니 어머니 속상하실까봐 말도 못해 서럽고...
어려울때 생각나는걸 보니 그나마 제가 정말로 친오빠같았나 봅니다.
아니면 호구거나!? ㅋ
에이... 호구는 아니에요.
어쨌든 몇년 전까지만 해도 무남독녀 공주님의 애완비글같던 애가 울고 있는걸 보니 참...
안쓰럽기도 하지만 제 스스로에게 정말 화가 나더군요.
이건 누가 봐도 허세부리다가 병신짓을 했구나...
그 이후로 자주 만나지게 되더라고요.
분명 그래서는 안되는데... 만나는 만큼... 다시 정이 생기는건 어찌 해야 할까요.
아. 그렇다고 지금껏 선은 넘지 않았어요.
도덕이라는 필터가 아직은 살아있기 때문이랄까요.
정말 몸이 이끄는대로 갔다면 진즉 사고쳤을텐데...
저때문에 한번은 가정이 깨질뻔 한 적도 있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귀국하고 얼마 안돼서 그녀석의 폰 안에 저장된 저와 주고 받은 문자를 본겁니다.
전화번호 주인은 남자 이름이고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들이 보이니 광분했다는군요.
오해가 너무 깊어지기 전에 제가 직접 나서서 오빠동생 사이니 처남 매제 사이로 이해해달라고 해명하며 대강 수습은 됐습니다만...
솔직히 너무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아직 결혼을 못했고 만나는 여자도 없어서 같잖은 인생으로 보였나?
한동안은 문제없이 지내는 듯 하더니 요즘은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뇌에서는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말려야 한다고, 반대로 감정은 제발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는 이중적인 잣대 때문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네요.
많이 혼란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