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가 낳은 세계적인 특급 공격수 바티스투타.
그는 17세 당시 야구선수에서 축구선수로 급전향 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슈팅과 절묘한 위치선정,
타고난 골감각을 보여주며 아르헨티나 최고의 득점기계로 불리며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22세 때 이탈리아 세리에 A 소속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 그는 경이적인 능력을 보여주며 팀의 히어로로 올라서게 되었고 피오렌티나의 주장이자 팀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94,98년 월드컵에 연속 출전, 모두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고, 해설자가 상당히 긴 그의 이름을 모두 읽기 전에 골을 넣는다는 의미의 "바티 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외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경력과 그의 능력이 아닌 그의 인간성에 있었다.
1994년 피렌체를 연고로 하는 피오렌티나가 2부리그인 세리에B로 강등을 당하게 되었다.
이번 유벤투스의 강등 사건에서 볼 수 있듯, 프로팀들에게 강등이란 처절한 충격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던 팀이 하루아침에 강등으로서 몰락하는 과정을 보이기도 하고, 팀의 세계적인 주축 선수들이 모두 다른 팀을 선택해서 이적해가는 등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골잡이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바티스투타였기에, 많은 피오렌티나의 팬들마저 그가 팀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명문클럽에서 거액을 보장하며, 그를 영입하려하였으나 바티스투타는 이를 모두 거절한 채 피오렌티나를 선택했다.
돈과 명예를 쫓아 수시로 팀을 옮겨다니는 시기에 바티스투타가 보여준 행동은 피오렌티나의 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2부리그인 세리에B에서 바티스투타는 신들린 감각으로 골을 뽑아내며 1년만에 바로 팀을 다시 세리에A로 승격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2000년, 나이가 30살이 되도록, 피오렌티나에서 우승컵 하나 들어보지 못한 바티스투타는 눈물을 머금고 이적을 결정하였다.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를 연고지를 하는 명문팀 'AS로마'였다.
AS로마에서도 역시 수많은 골을 뽑아내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며, 팀의 세리에 A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데에 바티스투타는 성공했다.
하지만 AS로마가 우승하던 그 시즌, 피오렌티나의 팬들은 바티스투타 때문에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AS로마와 이전 소속팀인 피오렌티나가 경기를 가지던 날, 바티스투타는 먼 거리까지 응원온 피오렌티나의 환호에 아무런 답변없이 경기에만 몰입했다.
1:0으로 AS로마가 승리한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선수가 다름아닌 바티스투타.
하지만 바티스투타는 골을 넣고 선수들이 흔히 하는 골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하위권에서 부진하던 팀에게 미안한 나머지, 자신을 응원하던 피오렌티나의 팬들앞에서 세레머니를 하지 않고 터벅터벅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기 진영으로 돌아오던 바티스투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피오렌티나 팬들은 비록 경기는 졌지만, 바티스투타에게는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었다.
현재도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인 아르테미오 프란키의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경기가 끝난 날, 한 신문에서 바티스투타에게 이런 말을 붙여주었다.
'그라운드 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바티스투타,라고.
귀화하기엔 나는 나의 조국 아르헨티나를 너무 사랑한다.-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귀화 요청이 있은 후.
힘들어하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다.-2002 한/일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표팀 16강 진출 실패 후 귀국 당시.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2001년 월드컵 예선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파산에 이르자 동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