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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16188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62
    조회수 : 6745
    IP : 125.185.***.30
    댓글 : 31개
    등록시간 : 2014/06/08 09:40:13
    http://todayhumor.com/?history_16188 모바일
    조선시대 최악의 악덕 기업주 이도(李祹) 대마왕
    이도(李祹) = 세종 대마왕의 이름임.
    요즘 이런 기업인이 있었다면 아마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당장 고발 당했을듯...
    피해 노동자 사례1. 세종 임금의 흑기사 곽존중(郭存中)
    세종 임금께서는 원래부터 술을 잘 못마심.​
    세종 7년(1425년 을사) 12월 2일, 지신사(知申事) 곽존중(郭存中)병으로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1월 11일, 경회루에 나아가 연회를 베풀다. 지신사 곽존중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하였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1월 23일, 동교에 거둥하여 매사냥을 구경하고, 낮참에 낙천정 앞 벌에서 머물렀다.
    호종하는 종친과 대신과 지신사 곽존중이 들어와 모셨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3월 12일, 명나라 사신 윤봉과 백언을 임금이 모화루에 거둥하여 맞이하며 칙서를 받들다.
    지신사 곽존중에게 명하여 두 사신에게 겨울옷 1벌과 갓, 신, 안장 갖춘 말을 주게 하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3월 13일, 지신사 곽존중을 보내 두 사신에게 문안하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3월 25일, 지신사 곽존중에게 명하여 두 사신에게 문안하게 하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4월 14일, 사신 윤봉이 노량에 나가서 놀므로 지신사 곽존중 등을 보내 연회를 베풀다 .
    세종 8년(1426년 병오) 4월 26일, 사신 백언이 수원의 어버이를 뵙고자 하니 지신사 곽존중을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세종 8년(1426년 병오) 9월 4일, 곽존중병조 참판으로 임명하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2월 16일, 곽존중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임명하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7월 4일, 곽존중경창부 윤(慶昌府尹, 중전의 비서실 정도)으로 임명하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9월 8일,  곽존중이조 참판 임명하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12월 6일, 곽존중을 다시 경창부 윤으로 임명하다.
    세종 10년(1428년 무신) 6월 22일, 곽존중이  세종 임금의 대타로 술만 마시다 졸하다. 부의로 종이 80권, 초 10자루를 내려주다.
    피해 노동자 사례2. 이직(李稷) 
    세종 7년(1425년 을사) 12월 10일, 영의정 이직(李稷)이 사직을 청하다.
    사직 사유, “신은 천품의 성질이 노둔(駑鈍)하고, 학술(學術)은 부족하며, 체질(體質)이 잔약하여 풍(風)과 기(氣)에서 오는 병이 겸하여 침공(侵攻)하고, 더욱이 나이도 노쇠하여 잊기를 잘하며,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합니다...<후략>"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1월 24일, 좌의정 이직(李稷)이 사직(辭職)을 청하다.
    사직 사유, “신(臣)은 본디 기질이 허약한데다가 노쇠(老衰)하여, 지난 겨울부터는 두 귀에 소리가 나고 막히어 잘 들리지도 아니하고, 정신이 혼매하여 일의 전후(前後)를 잘 망각(忘却)하며, 또한 풍허(風虛)한 여러가지 병이 동시에 발작하여, 비록 약을 먹으나 모두 효험이 없습니다...<후략> ”
    하니, 임금이 직집현전(直集賢殿)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그 사직하는 글을 돌려주고, 말하기를,
    경은 비록 듣기가 곤란하나 다른 병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그 관직에 나아가라.”
    이직은 과로로 죽기 싫어서인지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고 억지로 집에 가서 쉬어 버림.
    세종 임금은 이직에게 ​상정소(詳定所) 제조(提調)의 직위와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함.
    세종 9년(1427년 정미) 5월 19일, 사련소로 하여금 성산 부원군 이직에게 튼튼해지라고 날마다 우유를 보내줌.
    세종 10년(1428년 무신) 11월 29일,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이 《육전(六典)》 5권과 《등록(謄錄)》 1권을 편찬하게 함. 쉬어도 쉬는게 아님.
    이후 세종 임금은 뭔 일만 있으면 이직을 불러내서 의논하고 회의하라고 하고 그럼.​
    세종 13년(1431년 신해) 8월 7일,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이 졸(卒)하였다.
    ​거애(擧哀)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며, 치조(致弔)하고 부의(賻儀)로 쌀과 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 50권을 주고 관에서 장사(葬事)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나마 이직 할배는 70까지는 사셨음.
    피해 노동자 사례3. 노약자? 그거 뭐 먹는건가? 권진(權軫) 
    세종 4년(1422 임인) 2월 16일, 권진(權軫)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다.
    세종 5년(1423 계묘) 9월 29일, 권진(權軫)을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세종 7년(1425 을사) 6월 23일, 형조 판서 권진(權軫)이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음양이 때를 그르치는 것은 형벌이 중도를 얻지 못한 소치인가 합니다. 신은 나이 69세이온데, 지나간 계묘년에 비로소 형조에 벼슬하여, 늙고 둔함이 날로 더하여 앞일을 잊어버리고 뒷일을 실수하므로, 형률을 판결하는 직무에 합당하지 아니하오니 신의 관직을 파면하옵시기를 비나이다.”하니, 임금이 보고 전교하기를,
    “경이 만일 관직을 사면한다면 내가 다시 어떤 사람에게 그 직무를 맡겨야 하겠는가. 이제 사표를 도로 내어 주노라.”하였다.
    세종 8년(1426 병오년) 12월 7일, 권진(權軫)으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 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6월 13일, 의정부 찬성 권진(權軫)이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
    세종 9년(1427년 정미) 9월 8일, 권진(權軫)을 찬성(贊成)으로 삼다.
    세종 10년(1428년 무신) 7월 5일, 권진(權軫)으로 찬성사(贊成事)로 삼다.
    세종 12년(1430년 경술) 1월 8일, 권진(權軫)을 이조 판서로 삼다.
    세종 13년(1431년 신해) 5월 17일, 권진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다. 
    “신은 나이 75세로 노둔(老鈍)하고 혼매(昏昧)하여, 하는 일마다 실수하고 움직일 때마다 허물만 얻으므로 청의(淸議)에 부끄럽사온데, 더구나 농사철을 당하여 한재가 심하오니 실로 불초한 신이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진 이의 등용을 막습니다. 청컨대 신의 벼슬을 거두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3년(1431년 신해) 9월 3일, 권진을 우의정으로 삼다.
    세종 14년(1432년 임자) 6월 22일, 우의정 권진이 노병(老病)으로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5년(1433년 계축) 5월 16일, 권진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권진이 죽기전까지 세종 임금은 매번 그를 불러 정사를 의논하라고 함.​
    세종 17년(1435년 을묘) 4월 12일, 우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한 권진(權軫)이 죽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중지하고 조의(弔儀)와 부의를 보냈는데,
    쌀, 콩이 합하여 70석이고, 종이 백 권을 내림.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 주고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이라 하였음.
    피해 노동자 사례4. ​윤회(尹淮) - 드라마 정도전의 병조전서 윤소종의 아들임.
    세종 9권, 2년(1420 경자) 9월 14일, 술 때문에 자주 사고를 치는 윤회.
    임금이 윤회를 불러 책망하기를,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너의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하였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임금에게 술 때문에 욕먹음.
    세종 4년(1422 임인) 12월 10일, 병조 참의 윤회(尹淮)를 약간의 업무상 실수로 의금부(義禁府) 옥(獄)에 내려 가두었다.
    세종 4년(1422 임인) 12월 12일, 병조 참의 윤회가 파면 당하다.
    세종 4년(1422 임인) 윤12월 26일, 윤회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복직되다.
    세종 5년(1423 계묘) 6월 24일, 윤회(尹淮)로 동지총제(同知摠制)를 병조 참의를 삼다.
    세종 5년(1423 계묘) 9월 29일, 윤회(尹淮)로 예문관 제학을 삼다.
    윤회는 동지경연(同知經筵)사, 동지춘추(同知春秋)사, 좌부빈객(左副賓客) 겸직임.
    세종 5년(1423 계묘) 12월 29일,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세종 6년(1424 갑진) 8월 11일, 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나라의 모든 외교문서나 과거시험의 출제문제 등이 모두 윤회의 손을 거쳐 나감.
    세종 14년(1432 임자) 1월 19일, 영중추관사(領中秋館事) 맹사성·감관사(監館事) 권진·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신장 등이 새로 찬수(撰修)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임금에게 올리다.
    윤회의 모친이 돌아가심. 이 경우 벼슬을 그만두고 3년상을​ 치뤄야 함.
    세종 임금께서 3년 동안 해당 공무원을 부려 먹지 못해 짜증이 나심.
    임금께서 중요 관직의 공무원들은 딱 100일간의 장례 기간만 주고 100일이 지나면 바로 벼슬을 하라고 윽박지름.​
    세종 15년(1433년 계축) 3월 15일,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모친의 상 중에 임금의 복귀 명령을 듣고는 상소를 올림. 
    세종 임금께서 '어차피 3년상을 치루더라도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잊혀지겠냐. 그러니 그냥 일하면서 일로써 슬픔을 잊어라' 라고 하심. 워커홀릭이 되라는 말씀인가... 
    ​아무튼 윤화의 복귀 거부 상소를 윤허하지 아니하심.
    세종 15년(1433년 계축) 윤8월 1일, 윤회로 중추원사 겸 대사성을 삼다.
    세종 16년(1434년 갑인) ​여러 신하들을 집현전에 모아서 《통감훈의(通鑑訓義)》를 찬집(纂集)하는데,
    에게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의 벼슬을 주고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음.
    당시 윤는 풍질(風疾)을 앓았는데 거의 죽기 직전임. 아무튼 병을 참고 종사(從事)하더니 결국 세종 18년(1436년 병진) 3월 12일, 2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끝내 졸()하였다. 향년 57세.
     
    피해 노동자 사례5. 대대로 부려 먹힌 최윤덕(崔閏德)
    태종 임금 시절부터 엄청나게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린 최윤덕.
    태종 10년(1410 경인) 5월 22일, 상호군(上護軍) 최윤덕(崔閏德)을 동북면 조전 지병마사(東北面助戰知兵馬使)로 삼아, 궁시(弓矢)를 주어 보내다.
    태종 10년(1410 경인) 6월 1일, 최윤덕(崔閏德)으로 경성 병마사(鏡城兵馬使)를 삼다.
    태종 11년(1411 신묘) 1월 12일, 경성 절제사(鏡城節制使)에 최윤덕(崔潤德)을 임명하다.
    태종 11년(1411 신묘) 8월 5일,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최윤덕(崔閏德)으로 경성 등처 도병마사(鏡城等處都兵馬使)를 삼다.
    태종 11년(1411 신묘) 11월 26일, 최윤덕이 과로로 쓰러지다.
    태종 12년(1412 임진) 7월 25일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에 최윤덕(崔閏德)을 임명하다.
    태종 13년(1413 계사) 8월 23일, 최윤덕(崔潤德)을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로 삼다.
    태종 15년(1415 을미) 4월 18일, 최윤덕(崔閏德)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삼다.
    세종 즉위년(1418 무술) 8월 27일, 최윤덕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삼다.
    세종 1년(1419 기해) 4월 8일, 최윤덕(崔閏德)으로 의정부 참찬을 삼다.
    세종 1년(1419 기해) 5월 20일, 최윤덕을 대마도 정벌을 위한 삼군 도절제사로 삼다.
    세종 1년(1419 기해) 6월,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는 동안 최윤덕은 후방에서 지원함.
    세종 3년(1421 신축) 7월 4일, 최윤덕(崔閏德)을 공조 판서로 삼다.
    세종 7년(1425 을사) 7월 5일,  최윤덕(崔閏德)을 의정부 참찬으로 삼다.
    세종 9년(1427 정미) 1월 25일,  최윤덕(崔閏德)으로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를 삼다.
    세종 10년(1428 무신) 윤4월 20일, 최윤덕(崔閏德)으로 병조 판서를 삼다.
    세종 11년(1429 기유) 2월 4일, 병조 판서 최윤덕(崔閏德)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도순무사(都巡撫使)를 삼다.
    세종 12년(1430 경술) 1월 8일, 최윤덕(崔閏德)을 판중군부사(判中軍府事)로 삼다.
    세종 15년(1433 계축) 5월 16일, 최윤덕을 무장 출신으로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다.
    세종 16년(1434년 갑인) 2월 5일, 평안도 도안무 찰리사(都安撫察理使) 우의정(右議政) 최윤덕(崔閏德)이 사직(辭職)를 제출함.
    “<전략>.... 또 신은 본래 병이 있어 밥을 먹지 못하옵고 단술로 이를 대신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음양을 조화시키는 재상의 할 바 아니온즉, 다만 사람들로부터 오늘날 웃음을 사고 후세에 기롱을 남길 뿐입니다....<후략>”
    하니, 세종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죽을정도 아니면 그냥 벼슬 하시라고... 울 아빠랑 일 할때는 잘하시드만 나랑 하니깐 뭐 좀 불만이 많은것 같다능... '
    세종 17년(1435년 을묘) 6월 24일, 좌의정(左議政) 최윤덕(崔閏德)이 전(箋)을 올려 사직를 제출.
    “<전략>....신이 일찍이 병에 걸렸으면서도 직무에 종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신이 사양(辭讓)을 가식(假飾)하여 이름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살피시어...<후략>”, 최윤덕은 원고지 8매 정도 분량의 사직서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림.
    하였다. 임금이 원고지 6매 정도의 답장을 내려줌. '죽을꺼 아니면 그냥 하라니깐..."하고 윤허하지 아니함.
    세종 88권, 22년(1440 경신) 3월 1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崔閏德)의 계모(繼母)가 졸(卒)하였으므로 쌀·콩 합하여 30석, 종이 70권, 석회 60석을 하사하다.
    세종 24년(1442 임술) 5월 12일, 최윤덕(崔閏德)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삼다.
    세종 27년(1445년 을축) 12월 5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崔閏德)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예관(禮官)을 명하여 조상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미두(米豆)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관(官)에서 장사(葬事)를 지내 주고,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 내려줌.
    최윤덕 할배도 다행히 70까지는 사셨고 무장 출신으로 정승까지 하셨을 정도로 세종 임금에게 열심히 부려 먹히셨음.
    뭐 그래도 임금의 그런 믿음으로 인해 ​일하는거에 재미는 있으셨을듯.
    ​피해 노동자 사례6. 안숭선(安崇善)
    세종 8년(1426 병오) 6월 29일,  안숭선(安崇善)을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삼다.
    세종 10년(1428 무신) 6월 24일, 안숭선(安崇善)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삼다.
    세종 12년(1430 경술) 8월 16일, 안숭선(安崇善)으로 동부대언을 삼다.
    세종 13년(1431 신해) 2월 29일,  안숭선(安崇善)을 지신사(知申事)로 삼다.
    세종 15년(1433 계축) 9월 21일, 지신사 안숭선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사직서를 제출함.
    세종 임금께서 헛소리 하지 말고 그냥 일하라고 하심.​
    세종 16년(1434 갑인) 4월 2일, 도승지 안숭선이 사직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17년(1435 을묘) 2월 5일, 도승지 안숭선이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글을 올려 면직(免職)되기를 비니,
    세종 임금께서 의외로 허락하심.
    세종 17년(1435 을묘) 3월 20일, 전 도승지 안숭선의 어머니에게 종이 1백 권과 관곽(棺槨)을 부의(賻儀)로 하사하였다.
    세종 19년(1437 정사) 3월 22일, 안숭선(安崇善)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다.
    세종 20년(1438 무오) 4월 28, 대사헌 안숭선(安崇善)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전략> 다만 병의 근원이 지식(止息)되지 않고 음식의 절제를 잃은 탓으로, 숙질(宿疾)이 다시 발작하여 먹는 것이 소화가 되지 않아 종일 배가 부른 것 같고 음식 생각이 없으며, 점차 깊은 지경에 이르러 드디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니 전신이 초췌(憔悴)하고 약석(藥石)의 효력이 없습니다. 또 풍현병(風眩病)을 앓고서는 허리증(虛羸症)마저 겹치니, 평시에도 오히려 국록만을 먹는 것이 두려웠사온데, 어찌 병자의 기질로 능히 극무(劇務)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는 비록 면려(勉勵)할 생각이 간절하오나, 힘은 장차 넘어질 지경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옵서 천신(賤臣)의 간곡한 청원을 살피시와, 신의 직임을 해면하시고 한산(閑散)한 자리에 두시어 치료에 전력하고 힘써 정신을 기르게 하옵시면 길이길이 천지 같으신 은사를 받들어 시종 그 정성을 변치 않겠나이다.”
    세종 20년(1438 무오) 4월 28일, 안숭선(安崇善)으로 공조 참판을 삼다.
    세종 20년(1438 무오) 6월 29일, 안숭선(安崇善)으로 예조 참판을 삼다.
    세종 22년(1440 경신) 7월 12일,  안숭선(安崇善)을 경기도 관찰사로 삼다.
    세종 25년(1443 계해) 1월 5일, 안숭선(安崇善)으로써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삼다.
    세종 25년(1443 계해) 1월 11일, 안숭선(安崇善)으로 형조 판서를 삼다.
    세종 26년(1444 갑자) 12월 23일, 안숭선(安崇善)으로 지중추원사를 삼다.
    세종 27년(1445 을축) 1월 24일,  안숭선(安崇善)으로 병조 판서를 삼다.
    세종 28년(1446 병인) 6월 27일, 병조 판서 안숭선(安崇善)이 사직서를 제출함.
    "....<전략> ​신이 두 번 질병에 걸리매, 신기(神氣)가 혼모(昏耗)하고 사려(思慮)가 단천(短淺)하며, 일에 임(臨)하면 건망(健忘)이 심하여, 한 권의 글을 두어 줄만 읽으면 머리와 눈이 캄캄하고 흔들려서, 마치 배 위[船上]에 있는 것 같사옵고, 수십여 보(步)만 걸으면 허한(虛汗)4036) 이 몸에 가득하여 빨리 걷기가 어렵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증세가 모두 숨은 병이 아니옵고 사람이 함께 아는 것이옵니다....<후략>"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종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심.
    세종 29년(1447 정묘) 4월 18일, 안숭선(安崇善)으로 평안도 관찰사를 삼다.
    세종 29년(1447 정묘) 9월 6일, 평안도 감사 안숭선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다.
    세종 임금꼐서 의외로 허락하심!? 안숭선이 실제로 병이나 곧 죽기 직전이었던 모양임.
    세종 30년(1448 무진) 3월 11일, 병이 어느정도 회복된 안숭선(安崇善)으로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을 삼다.
    세종 31년(1449 기사) 3월 1일, 안숭선(安崇善)이 공무원 부정 인사청탁에 연루됨.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으로 귀양 감.
    세종 31년(1449 기사) 11월 2일, 안숭선이 석방됨. 신하들의 반대에 세종 임금께서 "안숭선은 세자를 위해 필요한 사람임."
    문종 2년(1452 임신) 4월 14일,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졸()하였다.
    피해 노동자 사례7. 직급이 낮아도 봐주는거 없음. ​김하(金河)
    세종 17년(1435년 을묘) 10월 3일, 세종 임금께서 상 중에 있는 전 사재 부정 김하를 벼슬하라고 명령 하심.
    사간원에서 상 중이므로 벼슬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상제(喪制)를 마치게 하자고 탄원을 넣음.
    세종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식으로 다 빠져버리면 누가 일을 하냐.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심.
    ​피해 노동자 사례8. 퇴근 금지 김종서(金宗瑞) 
    세종 13년(1431년 신해) 8월 18일, 좌대언 김종서에게 밤낮으로 공소에 머물면서 임금의 말을 밖에 전하게 하다.
    세종 임금께서 김종서를 불러 '내가 풍질(風疾)을 얻었으므로 나는 좀 쉴테니 네가 퇴근하지 말고 내옆에 있다가 내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 하라'고 하심.
    세종 13년(1431년 신해) 8월 22일, 좌대언 김종서에게 명하여 중국 사신에게 문안하게 하다.
    세종 14년(1432년 임자) 2월 25일, 사냥 중이신 세종 임금.
    좌대언 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내려 주며 말하기를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이 보이면 나 대신 쏴라고, 일명 대리사냥.
    세종 14년(1432년 임자) 7월 4일, 좌대언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중국 사신에게 문안하도록 하다.
    세종 14년(1432 임자) 10월 27일, 좌대언 김종서(金宗瑞)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가두라고 명하다. 공무원 부정 인사청탁에 연루된 혐의임. 10월 29일 석방됨.
    세종 15년(1433년 계축) 5월 16일, 무신 출신의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세종 임금께서 김종서와 상의해서 결정을 함.
    세종 15년(1433년 계축) 윤8월 12일, 김종서에 명하여 사신을 문안하게 하다.
    세종 15년(1433년 계축) 12월 9일, 김종서(金宗瑞)를 이조 우참판으로 함길도 관찰사로 삼다.
    임금 옆에서 과로로 죽울것 같던 김종서는 얼릉얼릉 함길도로 도망감.​
    세종 17년(1435년 을묘) 3월 27일, 김종서(金宗瑞)로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다.
    세종 17년(1435년 을묘) 4월 13일,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 김종서(金宗瑞)가 어머니를 뵙는 일로 부름을 받아 돌아오니, 임금이 사정전에서 불러 보고, 뭐 딱히 줄건 없고 입고 있던 홍단의(紅段衣)를 벗어 주었다.
    세종 17년(1435년 을묘) 4월 25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어머니를 뵙고 나서 하직 인사를 하러 임금을 만남.
    세종 임금이 옷과 궁시(弓矢)를 내려 주고는 '며칠 한양 와서 좀 쉬었으니 열심히 해야지? 함경도 갑산(甲山)에 가서 성벽 좀 보수하고 새로 쌓을 자리도 좀 알아봐'
    세종 17년(1435년 을묘) 10월 12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어머니가 졸하다.
    세종 17년(1435년 을묘) 11월 22일, 김종서가 어머니 상을 핑계로 혹시나 3년 동안 일을 시키지 못할까 염려된 세종 임금. 
    김종서의 모상 후 한달만에 승정원에 명하기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백일(百日) 후에는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 돌아와 임소(任所)로 가게 하라.”
    세종 18년(1436년 병진) 1월 21일, 함경도에서 고생만 하다가 어머니 상도 제대로 못치루게 하는 세종 임금이 미운 김종서가 상소를 올림. 어머니 상이라도 제대로 좀 치루고 인간답게 삽시다. 좀!
    세종 임금께서​, '함경도는 김종서 아니면 안되니 결코 다시 올리지 말고 억지로 최질(衰絰, 상복)을 벗고 빨리 그 직책에 나아가라.”고 윽박 지르심.
    세종 18년(1436년 병진) 2월 11일, 김종서에게 업무에 복귀하라고 여러차례 명령을 내리지만 김종서도 만만히 물러나지 않음.
    세종 임금께서 김종서에게 강제로 먹기 싫다고 하는 고기를 먹도록 명하여 드디어 김종서가 고기 먹고 일하러 감.
    세종 19년(1437년 정사) 8월 30일, 억지로 변방에서 고생하는 김종서가 회사일에 흥미를 잃었나 봄.
    ​세종 임금께서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이메일을 보내셨는데, '요즘 좀 빠진것 같던데 열심히 좀 하라'고 살살 타이르심.
    세종 18년(1436년 병진) 9월 26일, 감사 정흠지(鄭欽之) 및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더불어 안변(安邊) 이북 각 고을의 군정(軍丁) 2만 3백 명을 동원하여 회령부(會寧府)에 성을 쌓음. 
    성벽의 주위가 3천 9백 척(尺)이고, 높이가 15척인데, 무릇 25일 만에 준공 했다고 함..
    세종 19년(1437 정사) 3월 19일,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함길도의 인구와 호구를 싹 정리하락 명하심.
    세종 19년(1437 정사) 10월 20일, 모친의 담사(담제, 禫祭)를 지내겠다는 김종서의 상언을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9년(1437 정사) 10월 29일, 함길도 도절제사 군영(軍營)에 화재가 있었다. 임금이 듣고 김종서에게 겹옷 한 벌과 갓·신을 하사하면서, 사은하는 절차는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세종 80권, 20년(1438 무오) 1월 1일,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김종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陞進) 시킴.
    세종 20년(1438년 무오) 3월 1일, 김종서의 관할 구역인 경원의 절제사 이징옥이 모친 상을 당함,
    세종 임금이 김종서에게 모상을 당한 이징옥의 전임지 경원까지 커버하라고 하심.
    세종 20년(1438년 무오) 11월 14일, 무려 6년간 함길도 지키다가 과로로 죽을것 같던 김종서가 드디어 사직서를 제출함.
    '근심과 수고가 병이 되어 더욱 몸이 쇠약하고 마르며, 먹는 것이 날로 줄어들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옵니다.'
    세종 임금께서 '네가 함길도를 지키니까 이 정도로 조용한거 아니냐, 딴소리 말고 좀 더 있어라' 하고 사직서를 반려함.
    세종 21년(1439년 기미) 1월 23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아내의 병 때문에 잠시 한양으로 돌아옴.
    세종 21년(1439 기미) 윤2월 15일
    세종 임금께서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의 아내가 지금 공주(公州)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니, 어육(魚肉)의 종류는 다소를 논하지 말고 연속하여 주어 섭양하게 하라.”고 명하심. 네 마누라는 내가 책임지겠으니 일만 열심히 해...
      
    세종 21년(1439 기미) 7월 21일, 김종서의 형 종흥을 남양 도호부사로 옮기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승정원(承政院)에 글을 부치기를,
    “이미 장성한 자식이 없고, 아내가 또 본래 질병이 있어 죽을지 살지 알지 못하고, 또 어린 자식이 많아서 형(兄) 종흥(宗興)이 실상 신의 가사(家事)를 보살펴 주고 있는데, 지금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제수하였으니 마음에 실로 근심스럽습니다. 서울 근처의 수령으로 바꾸어 제수하기를 바랍니다.”하였으므로, 임금께서 두말 없이 명하여 남양 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로 옮겨 주었다고 함.
    세종 22년(1440 경신) 7월 5일, 김종서에 대한 문책을 논의케 하다. 너무 오래 함길도에서 잘하다 보니 시샘하는 다른 신하들 때문에 김종서를 할 수 없이 다시 한양으로 불러 올림.
    세종 22년(1440 경신) 12월 3일,  김종서(金宗瑞)로 형조 판서를 삼다.
    세종 23년(1441 신유) 11월 14일,  김종서를 예조 판서로 삼다.
    세종 28년(1446 병인) 1월 24일, 김종서를 의정부 우찬성 겸 판예조사(議政府右贊成兼判禮曹事)로 삼다.
    세종 32년(1450 경오) 2월 17일, 세종 임금이 먼저 돌아 가시다.
    ​피해 노동자 사례9. 조말생(趙末生) 
    세종 6년(1424 갑진) 1월 4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병으로 사직하려고 상서(上書)하나 윤허하지 않으심.
    세종 15년(1433 계축) 11월 17일,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趙末生)이 병(病)으로써 사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9년(1437 정사) 9월 4일, 지중추원사 조말생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1438 무오) 10월 27일, 예문 대제학 조말생이 사직을 청하다
    예문 대제학 조말생(趙末生)이 나이 70이 넘고 또 병이 있으므로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문관은 한가한 직책이므로, 경이 비록 병이 있더라도 조리를 할 수 있으니 사직할 생각을 하지 말라.”하였다.
    세종 23년(1441 신유) 10월 27일, 예문관 대제학 조말생이 늙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다.
    “예문관은 한가한 벼슬이므로 경이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조섭(調攝)할 수 있으니, 혹시라도 사직할 생각은 말라.”는 세종 임금.
    세종 26년(1444 갑자) 2월 7일, 조말생(趙末生)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삼다.
    세종 26년(1444 갑자) 5월 9일, 조말생(趙末生)으로 판중추원사·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삼다.
    세종 26년(1444 갑자) 12월 14일, 판중추원사 조말생(趙末生)이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하다.
    세종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심.
    세종 28년(1446 병인) 5월 11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조말생(趙末生)이 사직하기를 청하다.
    세종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심.
    세종 28년(1446 병인) 11월 28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조말생(趙末生)이 사직하기를 청하다.
    세종 임금께서 좀 더 부려 먹으실라고 사직서를 반려함.​
    세종 29년(1447 정묘) 4월 27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조말생(趙末生)이 졸()하였다. 향년 78세.
    □ 황희
    세종 9년(1427 정미) 10월 7일, 황희(黃喜)를 기복(起復)하여 좌의정으로 발령하다.
    ​※ 기복(起復) : 벼슬을 하던 신하가 부모상을 당할 경우 휴직을 하고 3년 동안 상을 치뤄야 하는데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 경우 임금의 직권으로 장례 후 100일 뒤에 다시 강제로 업무 복귀 시키는 제도.
    세종 9년(1427 정미) 10월 8일, 탈정 기복하라는 명에 황희가 사양하는 전을 올리나 아예 접수를 거부하다.
    세종 9년(1427 정미) 10월 28일(임오) 황희가 탈정 기복의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세종 9년(1427 정미) 11월 12일(병신) 기복(起復)한 황희가 기복의 명을 다시 거두기를 청하는 전을 올렸으나 접수를 거부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조종(祖宗)께서 이루신 법이므로 나는 법대로 한다. 불만이냐?
    세종 9년(1427 정미) 11월 27일(신해) 승정원에 전교하여 기복한 황희에게 고기를 먹이다.
    ※ 장례를 치루고 3년 상을 마칠 동안 고기를 먹으면 안됨. 이떄 임금이 기복을 시키면서 고기를 하사함.
    고기를 먹게 되면 어차피 버린 몸. 벼슬을 나가는거에 동의를 하는 것임. 그렇다고 임금이 고기 해다가 먹어라고 주는데 안먹으면 고기가 상하게 됨. 이렇게 되면 대역죄임.​
    황희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신이 늙었으매 혹시 병이나 날까 가엾게 여기셔서 고기 먹으라고 명하시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오리까.”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고기맛이 좋았던건지 몰라도 울고서 자리에 나아가 먹었다고 함.
     
    세종 14년(1432 임자)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임금께서 항회의 사직서를 반려하며,
    “...<전략>... 돌아보건대, 그렇게 많던 여러 대신들이 점차(漸次)로 새벽 하늘의 별처럼 드물어지고, 오직 한 사람의 늙은 재상이 의젓이 높은 산처럼 우뚝 솟아 서서 시정(時政)을 모아 잡을 만한 인망(人望)이 공을 버리고 그 누구이겠는가. 이에 삼공의 우두머리에 위치하여 신하와 백성들의 사표가 되게 하였도다. 아름다운 계책으로 임금에게 헌책하여 바야흐로 보살피고 의지하는 정이 깊더니, 몸을 보전하라는데 명철(明哲)하여 갑자기 물러가 한가롭게 지내기를 청하는가....<후략>.”
    세종 21년(1439 기미)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아무래도 과로로 죽을것 같지만 임금에게 사직을 청한다는건 씨도 안먹힌다는 걸 잘 알고 있음. 그래서 도승지 김돈에게 부탁해서 임금에게 황희 다죽어가니 퇴사 시키자고 분위기 좀 띄우자고 함.
    희(喜)가 하혈병(下血病)이 일찍이 있었는데, 근래에 다시 일어나서 귀와 눈의 어두움이 날마다 더하여 임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전(年前)에 여러 번 사전(辭箋)을 올렸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감(聖鑑)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한다.”이 이 뜻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일에 다시 아뢰어라. 영의정이 과연 정신이 흐리고 눈이 어두운가. 너의 보는 바는 어떠하냐. 모름지기 치사(致仕)하여야 마땅하겠느냐.”라고 따져 물음.
    김​이 세종 임금꼐서 따져 물으니 쫄았나 봄.
    “신의 소견으로는 귀가 어두움은 사실이오나, 정신은 혼매한 데 이르지는 아니하였사옵니다. 도덕(道德)과 지량(智量)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바이오니, 비록 늙고 병들어 허리가 굽었을지라도 치사(致仕)함은 마땅하지 아니하옵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결하게 함이 또한 옳겠습니다.”하니, 임금이  화색이 돌며, "그렇지?, 황희 좀 더 굴린다." 하였다.
    세종 27년(1445 을축) 6월 19일, 세종 임금이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영희정 황희는 나이 80이 넘었으나, 의정부의 일이 번거로우므로, 정신을 편히 수양할 겨를이 없을까 염려되니, 금후로는 전교(傳敎)로써 의논하게 한 공사(公事)와 본부(本府)의 합좌일(合坐日) 외의 일상 행하는 서무(庶務)는 번거롭게 맡기지 말도록 하라.”
    재택 근무를 허락하기는 하나 퇴직은 절대 안됨.
    세종 31년(1449 기사) 5월 27일, ​영의정 황희가 한재(旱災)로 인해 상서(上書)하기를,
    “신의 나이가 90에 가까운데, 공이 없이 녹을 먹으오니, 청하옵건대, 신의 직책을 파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
    종 2년(1452년 임신) 2월 8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그대로 치사(致仕)한 황희(黃喜)가 졸()하였다.
    ​피해 노동자 사례10. 정흠지(鄭欽之)
    세종 67권, 17년(1435 을묘 / 명 선덕(宣德) 10년) 3월 27일, 함길도 관찰사 자리가 비었음.
    함길도는 당시 세종 대왕이 영토확장에 가장 공을 들이던 중요한 위치임.
    세종 임금께서 정흠지(鄭欽之)함길도 도관찰사에 임명함.
    당시 정흠지의 나이는 58세. 또한 정흠지의 모친이 80이 넘었음. 신하들이 정흠지도 늙었고 또 그 어미도 오늘내일 하는데 변방의 중책을 맡기기가 어렵다고 반대를 함.
    세종 임금께서 말하기를,
    “어버이가 늙은 것은 한 개인의 집 사사로운 일이며 변경의 일은 중한 일이니, 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고 우기고 정흠지를 함길도로 보냄.
    흠지의 모친이 나이가 들어 자주 편찮으심.
    임금이 정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고기·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고 함.
    그러나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해져서 정흠지를 소환(召還)하여 중추원 사에 임명하여 한양에 머물게 함.
    결국 정흠지는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어 세종 21년(1439 기미) 6월 16일, 사망에 이름. 향년 62세.
     
     
    피해 노동자 사례11. 허조(許稠)
    세종 16년(1434 갑인) 12월 8일, 판중추원사 허조가 병약함으로 사직할 것을 상언하나 거절 당하다.
    세종 18년(1436 병진) 3월 26일, 허조가 사직을 원하나 허락치 않다.
    세종 21년(1439 기미) 11월 21일, 좌의정 허조가 위독하여 사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다   
    좌의정 허조(許稠)가 병이 위독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경은 본래 나이가 많고 또 오래된 병이 있으나, 다만 큰 일을 재결(裁決)하고자 할 뿐이었소. 근래에 밤낮으로 근고(勤苦)하므로 내가 그 숙질(宿疾)이 나은 것을 기뻐하였더니, 이로 인하여 병이 될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었소.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오. 경은 안심하고 병이나 조섭하오.”라고 딱 잘라 말함.
    세종 87권, 21년(1439 기미) 12월 28일,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하였다. 향년 71세.
    피해 노동자 사례12. 이맹균(李孟畇) - 목은 이색(李穡)의 손자임.
    세종 14년(1432 임자) 4월 12일, 참찬 이맹균의 칭병하여 사직을 주청한 상소를 올리다.
    “....<전략> 더군다나 이제 노쇠한 나이에 병이 많고, 음식을 먹는 분량이 갑자기 줄어들어서 형체와 기운은 날로 파리하여지고 정신은 날로 손모(損耗)되며 눈은 어둡고 귀는 멀어서 일을 당하면 아득하기만 하여 진실로 사무에 대응(對應)해 낼 수 없습니다.....<후략>" 구구절절 사직을 청하나 세종 임금께서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1435 을묘) 11월 25일, 이조 판서 이맹균이 사직하려 하나 허락하지 않다
    이조 판서 이맹균이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기를,
    “...<전략> 신은 지금 나이 70에 가까우니 노병(老病)이 번갈아 일어나서, 형체는 파리하고 기운은 피곤하며, 눈은 어둡고 귀는 먹어, 정신이 밝지 못하여 잊어버리기를 잘하니, 그 쇠한 것이 심한 편입니다. 한편으로는 직사(職事)를 버리고 돌보지 못할까 근심스럽고, 한편으로는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까 두려우니, 한산(閒散)한 자리에 버려 둠이 분수에 마땅할 것이며 그 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후략>” 라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세종 임금께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2년(1440 경신) 3월 24일, 좌찬성 이맹균이 전을 올려 사직을 청하다
    또 이[齒]와 머리[髮]가 이미 쇠(衰)하며 병조차 또 심하오니, 정신이 더욱 혼모(昏耗)하고 걷기가 어렵사옵니다. 귀의 어두움은 한(漢)나라 허승(許丞)과 다를 것이 없사와 얼버무려 가부(可否)를 결단하옵고, 잘 잊는 것은 화자(華子)와 같아서 선후(先後)를 기억하지 못하옵는데, 무슨 얼굴로 어진 이를 방해하오리까....<후략>”라고 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2년(1440 경신) 8월, 이맹균의 부인이 죄를 지어 이맹균이 귀양 가다. 이로써 자동으로 사직됨.
    세종 22년(1440 경신) 8월 30일, 전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이 귀양지에서 풀려 돌아오다가 객사하다. 향년 70세.
    피해 노동자 사례13. 유의손(柳義孫)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유의손(柳義孫)이란 할배가 있음.
    이 할배가 세종 임금 시절 이조 참판직에 있다가 사소한 잘못으로 파직 당함.
    유의손이 기회는 지금이다! 고향으로 도망가려고 함.
    얼마되지 아니하여 세종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는,
    “내가 들으니, 유의손(柳義孫)이 장차 행장을 꾸려서 남쪽으로 돌아간다 하니, 마음이 실로 참연(慘然)하다.”
    하고, 곧 행 집현전 부제학(行集賢殿副提學)을 제수함.
    그리고 얼마 후 ​병에 걸려 몸이 매우 수척하자, 집에서 치료하도록 명하고, 조금 뒤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제수하였는데, 친상을 당하여 병이 더욱 심해지니, 고기를 주어 권하였다고 함.
    ​결국 비실비시 얼마 못 버티다가 문종 즉위년(1450 경오) 6월 9일, 53세의 나이로 과로사 함.
    ​이외에 세종 임금 시절 수백명의 관리들이 제대로 월차, 연차도 없이 잔업, 야근을 하며 혹사 당했고 과로로 쓰러지거나 병에 걸려 죽음. 또한 부모의 3년 상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다 끌려 나와서 공무 수행을 함.
    또한 퇴직한 늙고 병든 관리들이라도 어떻게든 부려 먹으려는 세종 임금꼐서, ​
    세종 11년(1429 기유) 4월 23일. “날마다 상참(常參)하매 늙은 대신(大臣)들이 새벽에 예궐(詣闕)하면 병이 반드시 날 것이다.”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좌의정 황희(黃喜)·우의정 맹사성(孟思誠)·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찬성 권진(權軫)·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허조(許稠) 등에게 5일에 한번 참예하게 하고, 조계(朝啓) 때에는 각기 차례대로 입참(入參)하게 하라.”고 그냥 편하게 쉬지 못하게 함.
     
    그러나 하급 관리나 백성들, 하다 못해 노비들에게는 엄청나게 선심을 쓰심.
    세종 12년(1430 경술) 12월 6일, 상정소에서 숙위 군사 이외에는 탈정 기복(奪情起復) 시키지 말 것을 건의하자 세종 임금께서 두말 없아 동의 하심.
    또한 세종 13년(1431 신해) 5월 5일, '부모의 상(喪)은 지극히 중한 것이어서 기복(起復)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 장상의 신하와 숙위 무사(宿衛武士)로서 부득이하여 특지로 탈정(奪情)하고, 또 벼슬을 제수하는 이외에는 경중의 시위 무사(侍衛武士) 8품 이상은 모두 상제를 마치게 하고, 외방의 잡색군(雜色軍)과 내시위군(內侍衛軍)으로 상제 마치기를 자원하는 자는 그대로 들어 준다. ’고 하였으나, 그 외의 수륙 군정(水陸軍丁) 및 역이 있는 모든 사람과 공사 천인 등이라도 효성이 지극하여 시묘(侍墓)하기를 자원하는 자에게도 상제 마치기를 허락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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