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들의 반민특위 전복과정 일제청산.친일파 史
2007/02/19 18:10
http://blog.naver.com/worldcup007/80034865579 친일파들의 반민특위 전복과정 ①
친일파 재산환수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친일청산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친일파 재산 환수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친일파 후손들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무시하기 힘든 경제·사회적 권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재산환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반격에 대비하는 준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과거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처럼 그들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 후손들의 반격에 대비한 사회적 면역력을 기르지 않으면 지금 같은 소중한 기회를 지키기 힘들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50년 전 해방 공간에서 그들의 조상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 하는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들이 반민특위를 전복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본 뒤에, 이러한 사실관계를 기초로 친일파들의 주요한 특징을 분석해 보겠다.
물론 친일파 후손들이 50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취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50년 전 친일파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기본적 행위 유형을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
1단계 - 관망
제헌국회가 헌법에 친일처벌 조항을 규정하고, 1948년 8월 5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할 때만 해도 친일파들의 공개적인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들이 보인 행동 패턴은 '관망'이었다.
초기에 그들이 관망의 태도를 보이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던 데에는 대체로 3가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당시 상황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였다. 민족적 대의명분하에 진행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둘째, 1948년 8월 초순만 해도 처벌 대상인 친일파의 범주나 처벌 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어느 수준까지를 친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일단 지켜보자"는 태도를 보였다.
셋째, 당시 여러 가지 국정 현안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각 정치세력이 친일문제에 주의를 집중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친일 청산작업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급한 현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기 집단의 정치적 역량을 친일 문제에 집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2단계 - 내부 단결
1948년 8월 17일 제42차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안(이하 '반민법')이 상정되었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20일 김인식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 내 친일파의 숙청'을 제의했다.
반민법의 윤곽이 드러나자, 상황의 추이를 관망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처지를 밝혔다. 한민당 역시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확대하고 과도하게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고 밝혔다.
친일청산이 대의명분을 얻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노골적으로 반대 뜻을 표명하지는 못하고, 이처럼 그 부작용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제동을 걸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이승만의 반대 표명에도 김인식 의원의 제안을 가결했다. '정부 내 친일파 숙청안'이 가결됨에 따라 국회에서는 김인식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회특별조사위원회(이하 '국회특위')가 구성되었다. 가결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윤치영(내무장관)을 불러 대책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새로 구성된 국회특위에서는 유진오(법제처장)·민희식(교통부장관)·임문항(상공부차관)을 친일파로 지목했다. 민희식·임문항은 자진 사퇴한 반면, 유진오는 이승만의 비호에 힘입어 자리를 고수했다.
한편,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는 노골적인 목소리가 '독촉국민회'에서 터져 나왔다. 독촉국민회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다.
독촉국민회는 "공산당이 정부 파괴 공작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반민법을 제정하는 것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이적행위이며, 반민족행위자 처벌은 주권을 공고히 세운 후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친일청산을 이적행위로까지 매도했던 것이다.
이때 나온 독촉국민회의의 반공민족주의는 이후 반민특위가 활동할 때에 이승만 측의 반대 논리로 작용했다.
반대 목소리는 공안기구 쪽에서도 나왔다. 검사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사퇴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이보다 더 조직적인 움직임은 경찰에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반민법이 친일 경찰들을 핵심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민법 제정이 확실해진 1948년 8월 24일 김태일 수도경찰청 부청장을 비롯한 과·서장급 간부들이 '민족정기의 앙양'을 명분으로 퇴진을 결의하였다. 한편, 국무총리 이범석은 반민법 문제로 공무원들이 동요를 보이자 공무원들의 행동 자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집단 사직이나 성명서 발표 등은 꼭 친일청산 주도세력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친일파 내부를 단속하고 상호 간의 일체성을 확인하는 모티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초기 행동은 친일파들을 단결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내부적 단결을 강화한 다음에 친일세력은 드디어 외부적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표적은 국회였다. 다음은 3단계 '국회 압박'으로 이어진다.
"국회 안의 김일성 앞잡이를 숙청하라"
민족진영은 대의명분과 정의심으로 친일청산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 가혹할 수 없었다. 반면, 친일세력은 개인과 가문의 목숨을 걸고 친일청산에 저항했다. 그래서 그들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다분히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또 다른 한쪽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접근했다. 이것은 그동안 친일청산이 번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한 가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글은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두 번째 기사다. <필자 주>
3단계 - 국회 압박 :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起草)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때(1948년 8월 5일)만 해도 '관망'의 태도를 보이던 친일세력은 동년 8월 17일 제42차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상정되자 '내부 단결'의 단계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검찰·경찰과 독촉국민회 등에서 집단적인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집단 움직임은 친일파 내부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 단결에 이어, 친일파들은 3단계 국회 압박에 들어간다. 국회 압박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안(반민법)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2단계에서 내부적 단결을 강화한 친일세력은 이제 공격의 화살을 국회로 돌렸다. 우선 그들은 법안을 주도하는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으로 법안 제정을 주도하는 의원들에게는 협박장까지 발송했다. 이러한 정황은 <제헌국회속기록> 제1회 제49호(1948. 8. 26) 및 제50호(1948년 8월 27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 불온전단이 뿌려졌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반민족행위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공산당 주구다!""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안을 철회하라!"
친일파들은 대담하게도 국회 본회의장에까지 난입하여 방해활동을 벌였다. 8월 27일 법안 축조심의(조항별 심의)가 진행되는 국회 본회의장의 2층 방청석에서 갑자기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혁청년단(大革靑年團) 소속의 자칭 '애국청년' 2명이 벌인 행위였다.
8월 28·29일 <조선일보> <자유신문> <조선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 삐라에는 "친일파를 엄단하자고 주장하는 자는 공산당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편, 한민당 지도부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반민법 제정을 연기시키거나 완화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한민당에 매월 자금을 제공하던 친일자본가 1명은 "반민법을 무력화시켜 달라"며 거액의 자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친일파들은 이러한 돈을 지원받아 대지구락부(大地俱樂部)라는 반민법 반대 조직을 결성하였다.
한민당 지도부에 이어 대통령 이승만도 반민법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는 반민법 제정을 주도하는 국회특별조사위원회(국회특위)를 겨냥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지금은 친일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며 나라에 손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회에서 입법과정에 있는 법안을 두고 행정부의 대통령이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야말로 삼권분리 정신에 위반되는 담화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의 담화문은 친일세력을 고무시키는 효과를 가질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회특위의 활동은 움츠려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혹은 특위 위원들을 직접 불러 심리적 압박을 가하곤 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법은 1948년 9월 7일 제59차 국회 본회의에서 결국 통과되었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 "반민족행위자들, 처벌할 시기가 아니다"
반민법이 통과되었지만, 그것으로써 끝이 아니었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행정부로 이관되었다. 이제 공은 행정부로 넘어갔다. 그럼, 행정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반민법이 통과되자, 행정부 공무원들의 동요가 심해졌다. 아니, 동요라기보다는 공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공무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9월 14일 정부 각 부처 간부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훈시 한마디를 했다. "지금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할 시기가 아니다."(1948년 9월 15일자 <조선중앙일보>·<자유신문>)
법률안을 이송 받은 국무원(국무회의 기능)에서는 만장일치로 거부결정을 내렸다. 당시의 국무원은 지금의 국무회의 같은 심의기관이 아니었다. 합의체 의결기관의 성격을 띤 비교적 강력한 기관이었다(제헌헌법 제68조 참조). 이때 국무원의 거부사유는 다음 3가지였다.
첫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특별재판부의 구성원에 국회의원을 포함하는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된다. 둘째, 국회에서 특별재판관을 선출하도록 한 것은 법관의 자격을 법률로 정하도록 한 헌법 규정에 위반된다. 셋째, 일제하에서 특정 직책에 있었음을 이유로 처벌(반민법 제2조·제4조·제5조)하는 것은 "8·15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행위를 처벌한다"는 헌법 제101조에 위반된다.
의결기관인 국무원에서 반민법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9월 22일 정부는 결국 반민법을 공포하고 말았다. 정부가 반민법을 거부할 경우 국회가 양곡수매법을 부결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기인하여 할 수 없이 법률을 공포하였던 것이다. 정국 운영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공포된 반민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지금까지가 3단계에 해당하는 사실관계다. 이 시기에는 친일파들의 공격 목표가 국회에 집중되었으며, 행정부·한민당과 재야 친일단체 등이 그러한 공격을 주도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친일파 청산은 그 당시에도 민족적 과제였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이 '확실한 무기'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딘가 2%가 부족했던 것이다.
검찰·경찰과 행정부에는 여전히 친일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처단해야 하는데, 그 공권력 안에 친일파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친일파들이 재야에서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전 견제 없이 국회 입법 과정이 진행되었다. 엄호사격 없이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이 점은 지금의 친일청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친일청산을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여전히 공권력 안에 포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친일청산을 노골적으로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이 언론과 일부 사회단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아무런 사전 견제장치 없이 친일청산을 진행한다면, 뜻밖의 복병 앞에서 친일청산이 또다시 좌절될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반민법이 결국 공포되자, 이제 친일파들은 더 이상 국회만을 압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반민법이 국회 밖을 뛰쳐나와 대한민국 영역 안에 퍼지게 되었으므로, 친일파들의 활동무대도 전 대한민국을 무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친일파들의 본격적 장외투쟁이 시작된다.
제4단계 - 장외투쟁 : 그동안 국회를 주된 표적으로 삼던 친일파들은 반민법 공포를 계기로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공포된 반민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태아를 살해하려던 자들이 그 태아가 출생하자, 이제는 영아를 살해하기 위하여 광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민법 공포 다음날인 9월 23일 한국반공단(단장 이종형)이 주최하고 대한일보사·민중신문사가 후원하는 '반공구국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참고로, 한국반공단 단장 이종형은 대동신문을 경영하는 친일파로서, 반민법 제정과정에서 소급입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연일 내보내던 자였다.
이 반공대회의 실제 목적은 반민법 반대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국무총리 이범석이 직접 참석하여 격려사까지 행한 이 날의 대회장에는 다음과 같은 불온 삐라가 살포되었다.
"반민법은 일제시대 동장이나 반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어, 온 국민을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다."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것은 국회 내 공산당 프락치들이다."
"국회 안의 김일성 앞잡이들을 숙청해야 한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반대 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측의 친일청산작업은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9월 29일 국회는 친일행위의 예비적 조사기관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문제의 반민특위가 드디어 출범한 것이다.
반민특위의 시스템은 이러했다. 반민특위에서 예비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특별검찰부에서 본조사를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특위위원은 현행범이 아닌 한 위원장의 승인 없이 체포되지 않을 불체포특권을 부여받았으며(반민법 제11조), 정부 기타 기관에 대해 문서 제출이나 협력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동법 제15조), 직무를 수행할 때에 행동 자유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제16조).
또 특경대라는 특수경찰이 반민특위 안에 설치되었다. 10월 23일 열린 반민특위 제1차 위원회회의에서는 김상덕과 김상돈이 각각 위원장 및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제4단계에서 친일파들이 주로 구사한 방법은 친일청산세력을 공산당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당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법이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훈점이 될 것이다. 남북교류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수구세력이 걸핏하면 반공 메카시즘을 그들의 무기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친일청산 주도세력도 상대방이 가할지 모르는 반공 논리에 대한 대응 논리를 철저히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반민법이 공포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친일청산을 위한 시대적 의제가 합의되고 그 시대적 의제를 집행할 손과 발이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친일청산 주도세력이 일종의 '미니 공권력'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친일파들의 반격도 한층 더 강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 같은 '비교적 신사적인 방법'을 버리고, '암살 음모'라는 '점잖지 못한 방법'을 선택한다. 5단계 '암살 음모'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 이야기한다.
친일파의 맞불 "일제 때 동장 지낸 너도 친일파"
라스웰(Lasswell)과 캐플란(Kaplan)의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암살의 가능성은 높아지며, 암살은 흔히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주어 상대방의 정치적 의욕을 감퇴시키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통과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정치적 도구로서의 암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세 번째 기사다. <필자 주>
5단계 - 암살 음모: 1948년 9월 29일 반민특위의 등장은 친일파들에게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에 의해 정치적 보호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떠난 한국 땅에서 한국 민중들에게 둘러싸인 친일파들 입장에서는 잠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반민특위라는 '미니 공권력'까지 등장했으므로, 그들의 위기의식은 한층 더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민특위가 등장함에 따라 친일파들의 표적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회나 국회 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국회특위)를 주 표적으로 삼던 친일파들은 이제는 반민특위를 주된 표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자신들의 감각기관을 총 집중했다.
위원장·부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의 인적 구성이 완료된 1948년 10월 하순부터 일경(日警) 출신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암살 음모였다.
여기서 친일파들의 무기가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단결,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무기는 ▲집단사직 ▲성명서 발표 ▲개인적인 심리적 압박(이상 2단계)▲의정활동 방해 ▲전단지 살포(이상 3단계) ▲장외 집회(4단계) 등이었다.
이때까지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주로 내부 구성원들을 단결시키거나 친일청산 주도세력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거나 혹은 일반 대중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므로 4단계까지 그들이 겨냥한 것은 주로 인간의 '관념'이었다. 친일파나 친일청산 주도세력 혹은 일반 대중의 머릿속 관념에 자신들의 주장을 엔터(입력)하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적'의 신체에 대해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등장한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질적 변화를 가했다. 반민특위는 자체 경찰(특경대)까지 보유한 일종의 공권력이었다. 다시 말해, 이 조직은 물리적 힘을 보유한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조직을 상대로 더 이상 '관념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친일파들은 물리적 수단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공권력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암살)으로 맞서겠다는 계산이었다.
'관념전쟁'에서 '암살작전'으로...
친일파들은 이제 갓 출범한 반민특위가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암살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에 암살 음모에 참여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서울시경 사찰과 수석 홍택희, 전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 등등.
이들은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백민태는 한때 일제를 상대로 소위 '테러'를 벌이던 인물이었다. 친일파들은 그런 인물을 이용하여 반민특위 관련자들을 암살하고자 한 것이다.
11월 17일 친일파들은 백민태에게 구체적인 지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살생부를 백민태에게 전달했다. 명단에 적힌 암살 대상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김병로, 권승렬, 신익희, 유진산, 서순영, 김상덕, 김상돈, 이철승, 김두한, 서용길, 서정달, 오택관, 최국진, 홍순욱, 곽상훈.
여기서 김상덕·김상돈은 반민특위의 위원장 및 부위원장이었다.
친일파들은 반민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반민특위에 대한 암살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지만, 암살을 개시하기 전에 음모가 발각되는 바람에 5단계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음모자 중에서 최난수와 홍택희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노덕술과 박경림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반민특위가 '어른'이 되기 전에 '싹'을 제거하겠다던 친일파들의 5단계 계획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친일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상황은 6단계 '도피와 맞불'로 넘어간다.
6단계 - 도피와 맞불: 이제 1948년이 지나고 1949년이 밝았다. '워밍업'을 마친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에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착수했다. 친일파들도 '타석'에 들어섰다. 반민특위와 친일파의 한판 대결이 예고되고 있었다.
6단계에서 반민특위의 무기가 '검거'였다면, 친일파들의 반응은 '도피'와 '맞불'로 나타났다. 반민특위의 검거 활동에 대해 친일파들은 도피하든가 아니면 맞불을 놓든가 하는 대응 방식을 보인 것이다. 그럼, 그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의 신원을 파악한 반민특위는 검거활동에 착수했다. 1월 8일에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10일에는 대동신문 경영자 이종형을 검거하였다. 이종형에 관해서는, 앞선 4단계에서 잠시 살펴본 바 있다.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열심히 신문 기사를 썼던 자다.
반민특위가 거물급 친일파들을 연달아 '삼진아웃' 시키자 '대타 전문' 이승만이 또 등장한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며 입법부 및 사법부의 관대한 조치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과거보다는 미래'라는 구호는 예나 지금에나 친일청산의 단골 논리였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담화문에 맞서 반민특위에서도 대응조치를 내놓았다. 김상돈 특위 부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이승만의 간섭을 비판한 것이다.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검거활동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1월 13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최린을, 14일에는 친일 변호사 이승우와 일본 귀족 이풍한을 검거했다. 그리고 18일에는 이성근과 이기용을 검거했다. 이성근은 평북 특고과장과 충남지사를 역임한 자였다. 그리고 25일에는 친일 경찰 노덕술을 잡아들였다.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은 친일파들의 전선을 분열시켰다. 친일파는 움츠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 친일파들 사이에서는 2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한쪽은 도피하는 자들이었다. 또 한쪽은 맞불을 놓으며 정면 대항하는 자들이었다.
반민특위 검거선풍에 도피·정면대항으로 분열
처음에 나타난 반응은 도피였다. 반민특위의 '강속구'에 놀란 일부 친일파들은 "일단 숨자"는 결단을 내렸다.
친일파들 중에는 일본 밀항을 선택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어떤 자들은 밀항 직전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전 중추원 참의 방의석은 밀항 직전에 붙들렸고, 전 수도청 부청장 이구범도 밀항 직전에 부산에서 시민 제보로 체포되었다.
한편, 밀항 대신에 군대로 도피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상당수의 일경 출신들은 반민특위의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헌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반민특위의 위세가 아무리 당당할지라도 설마 군대까지 건드릴 수 있겠느냐'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들이 헌병대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헌병사령관 전봉덕이 바로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전봉덕은 친일파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주었다. 한편, 채병덕 참모총장도 군대에 들어오는 친일파들을 비호해 주었다. 국가 권력이 민족진영(국회·반민특위) 대 친일파(행정부·군대·경찰)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일 경찰의 대다수는 여전히 경찰 조직에 잔류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이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친일 경찰 30여 명이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
반민특위의 검거 작업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일제 헌병 및 경찰에 이어 중추원 참의 출신들도 붙들렸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 전쟁을 선동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정국은도 체포되었다. 2월 7일에는 친일파 문인 최남선과 이광수도 반민특위에 끌려 왔다.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을 거침없이 잡아들이자, 정부측에서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친일파들의 맞불 작전이 시작되었다.
1949년 2월초 정부측에서는 국무회의를 열어 '반민족행위처벌법 일부 개정의 건'을 통과시켰다. 반민법을 유명무실한 내용으로 바꾸려는 의도였다. 2월 15일에는 또 이승만이 반민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사람을 구금·고문한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개정 필요성의 근거였다.
이에 대해 반민특위는 물론 김병로 대법원장도 반발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병로 대법원장과 회동하여, 반민법 개정에 동참시키려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측의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지만, 국회는 2월 23일 회의에서 정부측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이즈음에 반민특위는 이승만에게 정부 내 친일파 조사를 요청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태도를 돌변했다. 이승만은 한술 더 떠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노덕술의 석방까지 요구했다. 김상덕 위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이승만은 또 "반민특위 활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런 행정부의 압박 속에서 반민특위는 1949년 3월 초부터 약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친일파들의 계속되는 압박이 반민특위의 힘을 빼놓고 있었던 것이다. 3월 4일에는 친일파 이광수가 도로 석방되었다. 최남선도 곧 석방되었다. 이는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특별재판부가 서서히 반민특위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경 출신 친일파들의 방해공작도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금·정보·조직 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1차 표적으로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골랐다. 특위 활동에 가장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반대에 적극적인 인물을 골라 본때를 보여 주자는 계산이었다.
3월초 김태선 서울시경국장과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이 반민특위 와해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후 경찰은 특위위원들에 대한 내사에 착수하였다.
여기서 친일 경찰들은 자신들 생각에 반민특위를 와해시킬 만하다고 여겨지는 '굉장한' 정보를 하나 건져냈다. 김상돈 부위원장도 알고 보니 자신들과 똑같은 친일파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김상돈 부위원장이 일제 때 총대(總代)를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총대는 지금의 동장이나 이장에 해당하는 지위다.
이런 '굉장한' 사실은 이승만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되어, 3월 19일에는 김상돈 부위원장에 대한 긴급 파면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반민특위에 대한 역공을 개시한 것이다. '친일'에는 '친일'로 맞불을 놓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국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김상돈 부위원장을 친일파로 몰려는 '진짜 친일파'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에는 친일로" 김상돈 부위원장 친일파로 몰아
친일파들의 맞불 작전은 계속되었다. 반민특위가 자신들을 물리적으로 잡아들이면, 자신들도 반민특위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에게 테러를 시도했다.
일례로, 3월 19일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김우종 조사부장의 호위경찰이 김우종 부장에게 총을 발사하였다. 김우종 부장은 이 때문에 몸에 부상을 입었다. 호위경찰은 오발이라고 변명했지만, 이것은 위장된 오발이었다. 그 호위경찰도 친일파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의 관여를 증명하는 지령문도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6단계에서는 반민특위와 친일파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반민특위는 검거로, 친일파들은 도피 혹은 맞불로 맞섰다.
이제 이들의 대결은 최종 라운드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 기사에서는 7단계 '물리적 타격과 국회프락치사건'을 다룬다. 반민특위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친일파, 2번의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 '안방'을 차지하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검거를 위해 출범했지만, 결국 친일파들에게 쫓겨 그 '안방'을 내주고 말았다. 1949년 7월에 등장한 제2기 반민특위는 문자 그대로 친일파들이었다. 이번 글은 7단계 물리적 타격과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네 번째 기사다. <필자 주>
1949년 3월 초부터 반민특위는 서서히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활동 개시 2개월여 만에 힘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상황은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단결,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 5단계 암살 음모, 6단계 도피와 맞불에 이어 최종 단계로 접어든다. 약화하는 반민특위를 고꾸라뜨리기 위하여 친일파들은 최후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친일세력이 공방을 주고받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3월 28일 첫 친일 공판이 법정에서 열렸다. 피고인이 된 이기용·박흥식(화신재벌)이 처음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친일파들은 재판부를 압박하기 위하여 법정 밖에서 장외투쟁을 벌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 친일파들은 서울 탑골공원과 반민특위 사무실 앞에서 반민특위 해체를 소리 높여 외쳤다. 또 그들은 시위를 벌여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첫 공판에 나왔던 박흥식이 4월 21일 심한 신경쇠약을 이유로 보석 되는 일이 발생했다. 9명의 특별검찰관들이 항의의 표시로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특별재판부는 이미 친일파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박흥식에 이어 친일파 재력가들이 속속 석방되었다. 공판을 3번 받은 최린(민족대표 33인 중 1인)도 공소취하를 받았다. 법정 밖에서 벌어지는 친일파들의 압박에 특별재판부는 서서히 그들 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킬 만한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1949년 4월 하순에 제1차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이란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fraktsiya)로 몰려 대거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1차 프락치사건에서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로 의원이 구속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제정) 위반이었다.
여기서 잠시 반민특위 와해 과정과 국회프락치사건의 상호 관련성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반민특위가 등장한 이후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주 표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집중적인 포화 속에 1949년 3월 초부터 반민특위가 약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친일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완전히 제거할 최후의 일격을 가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반민특위 무력화 작전
그런데 반민특위를 완전히 제거하자면, 그 뿌리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민특위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반민특위를 잉태한 국회였다. 국회를 무력화시키면 반민특위도 완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친일파들의 계산이었다.
시간적 여유를 갖게 친일파들은 이렇게 해서 국회와 반민특위를 상대로 양방향 포격을 가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국회를 상대로 한 것이 바로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할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시점이다. 1948년 12월 1일이라는 날짜는 반민특위가 본격 활동을 준비하던 시기인 동시에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파들의 공세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주로 반민특위를 겨냥하여 시행되었다. 국가보안법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수사가 헌병대·검찰·경찰의 공조 속에 진행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3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이들 기관이 사실상 친일파의 수중에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의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5월 23일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친일청산을 주도하던 국회에서마저 이상 기류가 나타났다. 석방 요구 결의안이 88대 95로 부결된 것이다. 이는 친일파들의 집중적인 포화 속에 국회마저 위축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의안 표결이 진행되는 동안, 친일파들은 서울 시내에서 "국회 내 빨갱이들을 추방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표결에 임한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일파들의 희망대로 석방 요구 결의안은 결국 부결되었다.
한편,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그 88명을 표적으로 한 공세도 진행되었다. 5월 31일 서울 탑공공원에서 국민계몽회라는 단체가 집회를 열어, "국회 내 빨갱이 88 의원을 잡아내라"고 요구했다.
6월 2일에는 친일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특위 요원들을 비난하면서 친일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제 반민특위는 더는 수사기관이 아니었다. 친일파가 수사기관이 되고, 반민특위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은 한편으로는 국회를 무력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반민특위에 대한 물리적 타격에 들어갔다. 최후의 일격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1949년 6월 3일. 친일파가 주도하는 시위대가 특위본부를 포위했다. 그리고는 특위본부로 밀고 들어갔다. 국가기관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경찰은 일부러 출동하지 않았다. 특위 소속의 특경대원들도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공포탄을 쏘며 해산 작전에 나섰다. 시위대가 밀리는 듯하자, 그제야 경찰들이 등장했다.
특경대는 시위의 주동자를 찾아 나섰다. 그 주동자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였다. 민간인도 아닌 경찰이 반민특위를 상대로 시위를 주도했던 것이다. 최운하 외에도 20여 명의 선동자들이 연행되었다.
특경대가 최운하를 구속하자, 친일경찰들이 또 반발하고 나섰다. 최운하 구속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각 경찰서 사찰경찰 150여 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서울시경 경찰 전원이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경찰들이 국가 기관의 해산을 요구한 것이다.
특경대가 눈에 거슬린 친일파들은 이번에는 특경대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반민특위의 수족을 잘라 버리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6월 5일 내무차관 장경근, 시경국장 김태선,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보안과장 이계무 등이 모여 특경대 해산 음모를 꾸몄다. 이날의 모임은 이승만의 사전양해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음 날인 6월 6일 윤기병은 중부경찰서 병력 40명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 본부에서 35명을 연행했다. 여기에는 특경대원 24명과 특위 직원 및 경호원 9명이 포함되었다. 한편, 지방 각지에서도 특위 지부들이 동시에 습격을 받았다. 6월 6일은 전국 곳곳에서 반민특위가 일대 수난을 당한 날이었다.
친일경찰들이 황당한 불법행위를 저지르자, 이번에는 국회가 대응에 나섰다. 국회가 내각퇴진 결의안을 상정한 것이다. 이 결의안은 89 대 59로 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타협 의사를 내비쳤다. 국회와 이승만은 친일경찰들과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하는 데에 합의했다. 포로 교환 석방을 연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각 퇴진 결의는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
친일파 반민특위를 접수하다
반민특위가 잠시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졌다. 1949년 6월의 일이었다. 특위위원인 노일환·서용길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김약수 국회 부의장도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들은 주로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는데, 이들은 반민특위 활동에 가담하였거나 혹은 미군 철수나 남북정치회의 개최 등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특별재판관 최국현·김장열이 사직하였다.
2차례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더 친일파들을 검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무실을 차린 지 5개월 만에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친일파를 추적하기 위해 출범한 조직이 도리어 친일파에게 추적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파상공세에 시달려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최후의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반민법 관련 법률을 개정함으로써 반민특위의 법적 근거를 아예 약화시켜 버리겠다는 것이다. 쓰러진 반민특위의 등을 짓누르는 행위였다.
친일파들의 주도 하에 반민법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개정안이 제안되었다. 이 개정안은 114 대 9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반민법이 잘못된 법이라고 생각했으면 반민법 자체를 없앴을 텐데, 자신들도 스스로 죄인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법을 없애지는 못하고 대신 공소시효를 단축해 버린 것이다.
공소시효 개정안이 가결된 다음날, 김상덕 위원장 이하 특위 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특별검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소시효 만료가 코앞에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수사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6월 29일에는 김구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반민특위의 마지막 의지처까지 사라졌다. 민족진영을 반민특위에서 몰아낸 친일파들은 이제 반민특위에 무혈 입성하였다. 김상덕 위원장의 후임으로 이인이라는 자가 신임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그전까지 반민특위를 반대하던 자였다.
이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반민특위는 중요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잔무 처리'였다. 7월부터는 친일파들이 반민특위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와 같이 친일파들의 격렬한 공세 앞에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반민특위의 추적을 받던 친일파들은 '어느새 몸을 확 돌려' 반민특위를 추적하더니, 1949년 7월부터는 아예 반민특위의 '안방'을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결국 친일파들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1948∼49년의 친일청산은 그렇게 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인과 가문의 목숨을 건 친일파들의 사투 앞에서 '점잖은' 반민특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럼, 1948∼49년 당시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압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 점에 관하여는 마지막 5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꺾은 10가지 비결, 국가보안법
친일파 청산이 국민적 명분을 얻고 있던 1948~1949년 시기에,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의 검거 열풍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1949년 7월부터는 아예 반민특위를 접수한 채 반민특위를 합법적으로 해산시켰다. 이토록 뻔뻔스러운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그들을 무조건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강한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후손들이 지난날의 추억을 또다시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마지막 기사다. <기자 주>
정상적인 경우라면,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인신(人身)의 형벌을 받았어야 마땅했다. 그들을 겨냥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되고, 그들을 검거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체포와 반민특위 보호를 위해 특경대라는 특수 경찰까지 설치되었다. 당시 반민특위는 합법이었고 친일파는 불법이었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합법이 불법을 누르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범(1948년 9월 29일)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제1기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반민특위를 반대하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 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같은 기적을 일으킨 친일파들에게는 어떤 노하우가 있었던 걸까? 여기서는 그 노하우 중에서 10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친일파, 이승만을 자기편으로 만들다
첫째, 친일파들은 대통령 이승만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친일파들은 이승만의 국정 운영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친일파의 수족이 된 꼭두각시 이승만은 친일청산 반대 성명을 수시로 발표하는 한편, 국회특위(국회특별조사위원회)나 반민특위를 끊임없이 압박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은 친일청산세력을 압박하고 친일파들을 단결시켰으며 또한 여론을 교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반민특위가 아무리 막강한 합법 기관이라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방해활동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친일파들은 국가 공권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내의 가장 강한 것을 활용하여 대한민국 내의 가장 강력한 적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한민당·정부·검찰·경찰·헌병·법원 등의 권력기구에 포진하고 있던 '동지'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특위 활동을 조직적·합법적으로 방해했다. 그들은 반민특위라는 미니 공권력을 압도하기 위하여 보다 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셋째,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수세에 몰린 그들이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국회프락치사건 덕분이었다. 친일파를 추적하는 반민특위를, 친일파들은 빨갱이라며 역추적했던 것이다. 이른바 '인생역전'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전복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타의 역할을 했다.
반민특위에 '친일파'라는 멍에 씌운, 친일파
넷째, 친일파들은 친일청산이라는 대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반공이라는 대응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네 번째 이유는 위 세 번째 이유와 중복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양자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위 세 번째 경우에는 반민특위와 관련된 것이지만, 여기서 거론하는 네 번째 이유는 일반 대중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대중에게 반공논리를 강제함으로써 대중이 반민특위를 지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려 하였다.
친일청산이라는 대의명분이 지배하는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반공논리를 앞세워 반민특위의 '전진 공격'을 돌파했다. 반공 논리가 어느 정도 주효했기 때문에, 막판에 그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이라는 '홈런'도 날릴 수 있었다.
다섯째, 친일파들은 전투 역량을 가급적 한 군데로 집중했다. 매 시기마다 가장 강력한 기관을 향해 그들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다소 여유가 생기면, '그보다 덜 강력한 기관'을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국회특위를 상대하다가, 나중에는 반민특위를 집중 마크했으며, 반민특위가 다소 약화되자 국회프락치사건을 벌여 반민특위의 '탯줄'인 국회를 다시 압박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점점 더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는 반민특위 소속 특경대를 물리적으로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철저한 '프로정신'을 보였다. 그들은 한 치의 인정도 베풀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친일청산 주도자들을 협박하거나 그들을 공산당으로 매도했으며 또 그들의 직무나 활동을 방해했다. 심지어는 암살도 시도하고 신체적 공격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테러리스트 백민태에게 살생부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반민특위 호위경찰을 사주하여 특위 요원을 살해하려고까지 한 그들이었다.
여섯째,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에게 친일파라는 멍에를 씌우려 했다. 친일에는 친일로 맞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김상돈 특위 부위원장이 일제 때에 총대(동장이나 이장 정도)를 지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방법이 지난 2004년에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시위, 테러 통해 대중에 공포심 심어준 '친일파'
일곱째, 친일파들은 대중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끊임없는 물리적 시위와 테러를 통해 대중을 심리적으로 단속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대중을 심리적·신체적으로 묶어 두었다.
여덟째, 친일세력은 조직·자금·정보 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명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해방 이전의 국민총동원조선연맹의 조직망이 잔존하고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재력가와 국가 기구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러한 절대 열세 하에서 반민특위가 전장(戰場)에 투입된 것이다.
아홉째, 친일파들은 기획력 측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했다. 반민특위는 중립적인 사법기관이었다. 그런 퍼스낼리티의 사람들이 교활한 친일파들을 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민특위가 법에 의거한 법률 집행을 시도했다면, 친일파들은 그런 게임의 법칙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적 투쟁의 방식을 사용했다. 친일경찰 등이 주도한 각종 비밀회의에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등의 각종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친일청산에도 시사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친일청산 집행기구에게 단순히 법률집행의 기능만 맡길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책기획 능력을 부여하는 방안 등이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열 번째, 친일파들은 국가보안법의 덕택을 톡톡히 보았다. 국가보안법이 어떤 명분으로 제정된 법이든 간에, 국가보안법은 친일파들이 위기에 몰린 1948년 12월 1일에 태어나 그 이듬해인 1949년에 여러 차례의 국회프락치사건에서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그것이 만들어진지 올해 58년째다.
친일파들은 대의명분에서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은 10가지 이유에 힘입어 반민특위를 제압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민족정기를 말살한 바탕 위에서, 그들은 일제 때에 벌어들인 재산을 합법적으로 보유하고 한국 사회 곳곳에서 최고 엘리트의 지위를 확보한 채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오마이뉴스 김종성기자]
소름이 끼친다.
역사는 정확하게 반복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