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기도 하고, 제가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서 벌어졌던 전투인지라...한번 올려봅니다.
이하 위키백과에 나온 내용입니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
곡군 왜관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
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은 전투입니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
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지요. 북한은 1950년 8월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교두
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투입된 5개 사단 중 제1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과 제
105전차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시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정리
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
개 사단을 배치하여 이에 대비했습니다. 제1사단은 8월 1일 미군 제25사단으로부터 책임
구역을 이어받아 9일 동안 낙동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여 6867명을 사살하고 각종 포 23문
과 탱크 10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8월 11일 육군은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
군위-보현산으로 이동하여 적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국군 제1사단은 강변 전투를 종
결하고 8월 12일 야간에 새로운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했습니다. 제1사단이 맡은 다부동지
구 지역은 왼쪽으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오른쪽으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는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로 통하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제1사단은 8월 13일에 집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제15연대가
328고지 일대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
지로 진출했습니다. 이에 북한군도 8월 13일 제3사단 일부 병력을 투입해 328고지를 공격
하고 제15사단도 국군 제1사단보다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
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습니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
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죠. 북한군은 8월 15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빼앗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벌였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했으며 제11연대도 탱크 7대를 앞세운 연대 규모의 공격으로 복
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대구 방면에서 공격이 한창일 때 8월 16일 11시 58분~12
시 24분에 UN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 일
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습니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
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예비 전력인 미 제25사
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습니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
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 지역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
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
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
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8월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미 제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 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
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습니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
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 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습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포로 적전차 2대를 파
괴하였으나 이런 전과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
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고,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8월 19일 수암
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
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제8군 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
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고,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
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밤 북한군 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
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
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
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
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습
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습니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
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 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
행하였습니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 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대응하였습니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
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하늘을 화광으로 물들였습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
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
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불렀습니다. 더구나 다음날 8월 21일 오전에 북한군 제13사단의 정봉욱 중좌가 제11연대
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
공했습니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 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
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게 됩니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
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
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전투를 중단한 상태였으며, 북한군 제
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습
니다. 8월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
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습니다. 또 8월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 만에 탈환
하게 됩니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
령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
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
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큰 공을 세웠습
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
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
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징집된 학도병들이 찍힌 사진. 다부동 전적지에 가면 학도병 전사자들의 유품들이 전시되
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자나 필기구 등 학용품들을 주머니에 넣은 체로 전장으로
끌려와 목숨을 잃은 학도병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지더군요.
2. 다부동 전투 당시 1 사단을 지휘한 백선엽 장군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