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리뉴는 10대시절 5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포르투칼의 작은클럽벨레넨세스,히우아베,세싱브라에서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전혀 인상 깊지 못했다.
2.무리뉴의 아버지 펠리스 무리뉴는 당시 3부리그 칼다스 감독이었다. 그에따르면 조세 무리뉴는 이미 중학생 나이에 놀라운 경기 분석하는 능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그는 조세 무리뉴에게 상대팀 분석하라고 시키면 조세는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하곤했다.
3.조세의 아버지 펠리스 무리뉴는 지도자로서 승승장구했고 2부리그 클럽‘아모라’로 이적했다. 78/79시즌엔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펠리스는 조세 무리뉴를 16살부터 팀의 전력분석원으로 일하게 했다.
4.무리뉴는 스스로 코치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다고 믿었다 한다. 그는 23살에 어머니의 권유로 비지니스 스쿨에 입학하였으나 하루만에 자퇴서를 내고 리스본 기술대학 ISEF에 진학해 스포츠 과학에 대해서 공부했다. 이때가 무리뉴의 이론을 정립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무리뉴는 특히 스포츠과학의 체력파트 심리파트랑 철학강의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5.무리뉴는 수업이 없는 날만되면 아버지에게 가서 전력분석원일을 해주었고 무리뉴는 그 일을 너무나 사랑했다고 한다.
6.무리뉴는 스포츠 과학 학위를 취득한 이후 3년간포르투칼 전역을 돌며 체육교사로 일했다. 특히 장애아동학교에 주로 갔다고한다.
7.1988년 무리뉴는 SFA가 주관하는 UEFA 코칭 라이센스 코스에 참가했다. 스코틀랜드 라그스에 위치한 인버클라이드 국립스포츠센터에서 2년간 축구지도자가 되기 위한 실전코스를 받았다. (맨유의 레전드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8.당시 무리뉴를 지휘한 선생은 UEFA 기술위원장 앤디 록스버그다.
9.무리뉴는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것보다 현장에서 익히는게 헐씬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향 세투발로 떠났고 그곳에서 무리뉴는 16세 18세 이하 팀을 지휘했다. 성과는 즉각적이었고 팀은 팀 역사상 최초로 포르투칼컵을 들어올렸다.
10.당시 감독이던 페르난데스가 에스트렐라로 팀을 옮기면서 무리뉴를 피지컬 코치로 데려갔다.
11.거기서 팀은 UEFA컵 위너스컵에 출전했고20대였던 무리뉴는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 2부리그로 강등되면서 감독과 무리뉴는 해고시켰다.
12.그러나 무리뉴는 영국의 명장 보비 롭슨을 만나면서 큰 전환점을 맡게 된다.평소 언어의 재능을 보이던 무리뉴는 리스본에서 롭슨의 통역가를 일을 했고 1996년에 롭슨은 무리뉴를 바로셀로나로 데려간다. 당시 무리뉴의 나이는 33살이었다.
13.통역가로 데려간 롭슨이지만 매번 무리뉴의 분석에 놀랐다고 한다. 무리뉴는 바로셀로나 통역가였지만 훈련방식을 만들었으며 매번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다고 한다. 무리뉴는 상대 리포트를 작성하는것부터 롭슨이 필요한 모든 일을 했다. 대신 기자회견에서 언론을 상대하는 일은 줄어들었다고 한다.
14.롭슨은 무리뉴의 리포트를 처음 본 “내가 본 보고서 중 가장 완벽한 보고서다. 충격적인 보고서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바로셀로나 구단은 잘 알고있었고 그래서인지 무리뉴의 연봉은 3만 5000파운드였다 우리나라 돈으로하면 6000만원이 넘는 셈이다. 그렇다 무리뉴는 축구역사상 최고액 급여를 받는 통역가였다.
15.2000년도에 무리뉴는 다시 코치 라이센스를 따기로 결심했다. 무리뉴는 틈틈히 스코틀랜드에 들려 수업을 참관했고 당시 지도를 한 토니 맥킨리감독은 그에 대해서 회고했다. “무리뉴가 축구에 대해 애기하면 나 자신도 엄청난 영감을 얻었다.나는 거의 대답하지 못했고 난 듣고만 있었다.” 무리뉴는 1988년에 시작해2000년도가 되어서야 12년만에 코치 라이센스를 딸수가 있었다.
16.2000년 롭슨감독이 뉴캐슬에이적할때 무리뉴에게 뉴캐슬에서 3년동안 수석코치 생활 후 감독직을 약속하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무리뉴는 거절했고 무리뉴는 바로셀로나에서도 코치직을 권했지만 그만두고 통역가 일도 그만두었다. 무리뉴는 자신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17.무리뉴는 고향으로 돌아가 감독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보더 더 완벽할 수 없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나는 나를 고용하고 싶어 하는 누구에게든 소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분명한 목표와 야망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나의 직업을 신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정리한 문서도 가지고 있다.”
18.얼마 지나지 않아서 99/00시즌 말미에 포르투칼 명문구단 벤피카는 무리뉴에게 독일의 하인케스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로 일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무리뉴는 거절했다. 무리뉴는 감독으로서 이미 준비는 끝맡쳤다고 생각했다. 2000/2001시즌 4주만에 경질된 하인케스를 대신해 벤피카는 무리뉴를 선임했고 그렇게 무리뉴의 감독커리어는 시작되었다.
19.시즌 도중에 합류한 무리뉴에게 추가영입은 할수없다고 통보했다. 구단이 원했던건 유스출신 선수들로 구단의 정체성을 찾는것과 트로피로 다시 명문구단의 위상을 되찾는것.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선수단의 규율을 잃어있던것이라고 말했다.
훈련당시 부상을 핑계로 훈련장엔 훈련을 하지 않는 선수만 4~5명이 나 나왔고 당시 선수단의 의지를 전혀 찾아볼 없었다고한다.
무리뉴는 당시 선수들을 보고... “우스꽝스러운 수준이었다. 이들은 멀끔하게 생긴 청년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고 말했다.
20.무리뉴는 유소년 팀 선수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에 대한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노력하는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만 선발 명단에 들어갔다.무리뉴는 한달에 750유로만벌던 지오구 루이스,제랄두,누누 아브레우를 1군에 합류시켰다.
이 선수들은 굉장히 경쟁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새로운 선수들을 합류시킨 결과 다른 선수들의 사고방식마저 바꾸게됐다. 거기에 무리뉴 자신역시 훈련방식을 바꾸었다. 예를들면, 가로와 세로가 30m 정사각형 안에 두팀이 공을 뺏는 훈련을 시킨다.
그 다음에는 30m를 10m로 줄인다. 그러자 선수들이 더 가까워지면서 신체적 접촉과 적극성과 경쟁심이 증가했다.
21.무리뉴는 연습경기를 통해 교정이 필요한 선수들을 색출했고 벤피카의 스타 플레이어인 마니시가 경기 2분만에 무리한 태클로 퇴장당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들어오자 무리뉴는 그에게 전반전동안 운동장을 돌라고시켰고 그는 온몸으로 무리뉴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그는 8분동안 2바퀴를 돌뿐이었고 그걸 본 무리뉴는 이제 그만 들어가서 샤워해도 좋다고했다.
그 다음날 무리뉴는 그에게 2군행통보를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너는 8분동안 고작 800m밖에 뛰지 못했다.이는 두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신체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걸 찾아 치료를 해야하는거다. 정신적 신체적 문제가 없을때까지 2군에서 훈련하며 문제를 찾아와라 그 다음에 나를 만나러 와라.”
마니시는 4일뒤에 무리뉴를 찾아왔고 정중히 사과하며 무리뉴는 그에게1000유로 벌금을 매긴뒤 다시 1군으로 불렀다.이후 그 어떤 선수도 무리뉴의 규율을 어기지 못했다.
무리뉴는 부임후 첫경기 패배했지만 10경기 6승 3무 1패로 하위권인 팀을 상위권으로 반등시켰다. 그러나 벤피카의 회장이 선거로 통해 바뀌고 무리뉴는 회장의 정치질로 인해 10경기만에 해고됐다.
22.무리뉴가 두번째로 부임한 팀은 UD라이리아라는 포르투칼리그의 아주 작은 팀이었다. 오랜기간 하위리그에 머물다 1부리그에 올라와 마누엘 주제 감독의 지휘아래 돌품을 일으키고 있던 팀이었다. 사실 당시 마누엘 감독은 그 시즌을 끝나면 다른팀으로 옮길 생각이었던것이고 라이리아 이사진은 사실 여러 감독 후보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무리뉴에게 털어놓았다.
잠시동안 벤피카에서 본인의 능력을 보여준 무리뉴는 그 후보중 최상위권에 있었다. 연봉은 벤피카의 절반수준이었다. 무리뉴역시 이사진들에게 작은 클럽에 오래있고싶지않다.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낸 뒤 빅클럽 중 한팀으로 이적할수 있다고 말했다 무리뉴가 목표한 순위는 4위였다고한다.
그러나 그 2001-02시즌 전반기 무리뉴는 이 팀을 3위로 이끌었다. 그러나 무리뉴는 약속을 한가지 어겼다. 최소 한시즌 이후 떠나겠다고 했지만 크리스마스휴가때 당시 자신과 오랜기간 좋은 관계를 맺어오던 조르제 핀투 더 코스타 회장이 팀 역사에 남을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포르투를 구제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않았다.
그리고 라이리아는 후반기 부진을하며 팀은 리그 중위권까지 떨어졌다.
23.당시 fc포르투는 리그6위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있었다.무리뉴는 부임이후 현재 fc포르투를 보고
“내가 26년동안 지켜봐온 포르투중에 지금이 가장 최악의 포르투다.”
라고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그리고 무리뉴는 포르투에서의 공격적 축구를 약속했다.
“난 공격축구를 시도할 것이라고 약속한다.이 목표를 가지고 매일같이 훈련할 것이다.우리는 시스템적으로 완벽해지고 자동적인 모델을 갖출때까지 공격축구를 위해 나아갈것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 공격축구를 보여줄수있을것이다. 그전까지는 공격축구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것이다.”
무리뉴는 현재 포르투로는 우승할수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시즌을 다음시즌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시즌으로 사용했다.
"나는 딜레마를 마주했다.다음시즌에도 나의 팀에 속하게 될 10명에서 12명의 선수를 꽉 잡고 가야 할지,그들을 중심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지,아니면 내 방법이 먹히지 않는 전체 그룹 모두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좋을지? 시즌 도중에 일을 시작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두가지 선택뿐이다.
첫번째는 심리적으로 충격을 주는 것인데,난 이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자는 순수하게 감독이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오는 효과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밖에 효과를 주지 못한다.선수들의 심리적 수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모두가 새로운 감독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고자 할 때는 먹히겠지만 누가 선발로 나서고 누가 벤치에 앉게 될지 정해지면 원상 복구된다.
이 시점이 됐을때 감독은 선택해야한다.
소강상태에 처하고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아진다면 감독은 방법론적인 충격을 줘야 한다.이는 전자와 반대로 장시간 효과를 발휘한다.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이 경우 일에 대한 철학과 플레이의 모델 자체를 바꿀 수 있다. "
그 해 결국 포르투는 리그3위로 마감했고 2002-03,2003-04시즌 무리뉴의 포르투는 공격적인 축구로 자국리그와 UEFA컵 챔피언스리그 모두에서 역사적인 시즌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