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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이토히로부미 암살미수 원태우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이 와중에 안양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간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배신자가 생겨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이 배신자가 바위를 치우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짱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힘껏 던졌다.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이토 히로부미의 마빡에 정확하게 헤드샷 되었다.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경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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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우(元泰祐, 1882년 3월 4일 ~ 1950년)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때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 관광을 다녀온 후 서울로 되돌아간다는 첩보를 입수한 원태우는 안양에서 진을 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전복시키기 위해 레일에 바위를 깔아놓는 것을 시도했으나 겁을 먹은 이만려가 바위를 치웠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래도 원태우는 어떻게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돌을 들고 안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지나가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졌다. 원태우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창문을 깨고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머리에 명중되었으며 이때 깨진 유리파편 중 8조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급하게 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원태우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은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후 원태우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다. 온몸에 고문으로 인한 상처자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중근 등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후 원태우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착취로 인하여 매우 힘겹게 살아가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원태우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인물평원태우는 농민 출신으로 특별히 학식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항상 올바른 일에 앞장섰으며 불의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때문에 을사조약에 대해 누구보다 분개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가장 먼저 살해할 계획을 하게 되었다.
또한 원태우는 돌가공에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그가 살아생전에 직접 만든 절구 2개가 현존하며 그 중 하나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ruffian71/2202385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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